10여 년간 양조장 없이 수제 맥주를 제조한 브랜드가 있습니다. 2006년에 코펜하겐에서 설립된 ‘미켈러 바(Mikkeller)’입니다. 이 수제 맥주 브랜드는 2,000여 종의 맥주를 개발하는 동안 타사의 양조 설비만을 사용해왔는데요, 그렇다고 해서 맛과 품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글로벌 맥주 평가 플랫폼 ‘레이트 비어(Ratebeer)’의 세계 최고 맥주 차트에서 6년 동안 20위 안에 이름을 올렸죠.
맥주를 양조하는 자체 설비가 없으니 활동의 폭이 넓어집니다. 우선 다양한 브루어리와 협업해 실험적인 맛의 한정판 맥주를 선보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양조장 설비를 빌려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거죠. 또한 설비에 투입할 시간, 비용, 노력 등을 다른 영역에 쓸 수 있게 되는데, 이 여력 중 일부를 캐릭터와 디자인에 사용했습니다. 대표 캐릭터 해리와 샐리를 개발하고 인테리어 곳곳에 개성있는 방식으로 활용해 이목을 끄는 데 성공했죠. 현재는 뉴욕, 방콕, 샌프란시스코, 서울 등 세계 각지에 50여 개의 점포를 보유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양조장 없이 작게 시작했기에 오히려 더 커질 수 있었던 셈입니다.
미켈러 바는 파리, 헬싱키, 서울, 도쿄 등 세계 각지에 50여 개의 점포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Mikkeller
이처럼 집시 브루어리의 필요조건이 수제 맥주 시장의 성장이라면, 우리나라 부산에서 집시 브루어리가 등장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2014년 국내 주세법 개정 이후 늘어난 소규모 양조장 덕분에 부산이 수제 맥주 성지가 되었거든요. 레이트 비어가 2016년 발표한 ‘한국 맥주 베스트 10’에 부산 수제 맥주가 무려 4개나 포함될 정도로요. 당시 부산의 양조장 보유업체가 7곳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더욱 흥미롭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탄생한 부산의 집시 브루어리가 바로 ‘테트라포드 브루잉’입니다. 미켈러 바가 자체 양조 설비를 구축한 다음 해인 2017년에 등장해 마치 바통을 넘겨받기라도 한 것처럼요.
테트라포드 브루잉은 수제 맥주 브랜드지만 직접 양조장을 운영하지 않습니다. 맥주 제조 면허도 보유하고 있지 않은데요. 대신 자체 레시피를 가지고 다른 양조장에 의뢰하여 맥주를 만듭니다. 집시 브루어리는 이름에 걸맞게 여러 양조장을 떠돌아다니는데, 테트라포드 브루잉은 부산의 양조장인 갈매기 브루잉과 협업했습니다.
물론 테트라포드 브루잉은 양조 설비만 없을 뿐, 독립적인 양조 기술과 노하우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핵심적인 소프트웨어 경쟁력을 갖춘 동시에 하드웨어 비용은 줄인 비즈니스인 것입니다. 양조 설비 구매 및 유지에 드는 비용과 인건비를 더해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에 이르는 돈이 절감되죠. 초기 투자 비용과 고정비를 줄이니 진입장벽이 낮아집니다. 대규모 자본이 없어도 비교적 가볍게 수제 맥주 시장에 뛰어들 수 있게 된 셈입니다.
게다가, 집시 브루어리는 수제 맥주 관련 경력이 없어도 시작해볼 수 있습니다. 타 양조장과 협업해가며 경험과 노하우을 쌓아갈 수 있으니까요. 디자인 컨설팅 회사 ‘플러스엑스’가 수제 맥주 시장 진출을 위해 파고든 지점도 이곳입니다. 부산의 수제 맥주 브랜드 갈매기 브루잉 서면점을 운영하는 박서준 대표와 손을 잡고 자체 브랜드를 만든 것이죠. 플러스엑스는 BTS의 브랜드 리뉴얼을 담당한 회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BTS를 ‘성장하는 청춘들의 초상’, ‘Beyond The Scene’으로 재정립했는데요. 플러스엑스는 브랜드 경험 설계 분야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부산의 수제 맥주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집시 브루잉으로 비용을 줄인 덕에 강점에 집중할 여건이 마련되었으니까요.
ⓒplus-ex
플러스엑스의 강점은 브랜드 경험 디자인입니다. 이에 걸맞게 테트라포드 브루잉이 주는 브랜드 경험 역시 인상적이죠. 브랜딩의 중심엔 일관된 비주얼 요소인 테트라포드, 즉 방파제가 있습니다. 바닷가에 가면 흔히 보이는 방파제를 앙증맞게 축소해 입구 손잡이, 맥주를 따르는 탭 핸들, 메뉴판 등 매장 곳곳에 녹여냈죠. 하이라이트는 맥주 샘플러 트레이입니다. 테트라포드를 본딴 삼각형 모양의 트레이에 세 개의 맥주잔이 안정적으로 배치되도록 디자인했는데요. 이렇게 테트라포드가 맥주잔을 단단히 떠받치는 형태는, 테트라포드 브루잉의 비즈니스 구조가 디자인 기반의 수제 맥주 브랜드라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처럼 느껴집니다.
ⓒ테트라포드 브루잉
폐선박의 조명과 거친 질감의 벽돌, 메뉴판에까지 적용한 테트라포드 디자인이 공간에 일관성을 높여줍니다. ⓒ테트라포드 브루잉
#3. 업의 본질보다 강력한 고유 기술
테트라포드 브루잉이 여느 수제 맥주 브랜드와 차별화되는 지점은 또 있습니다. 디자이너 네트워크인데요. 다른 디자인 팀과 협업해서 맥주를 출시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디자인 스튜디오 슈퍼픽션과의 콜라보입니다. 슈퍼픽션의 시그니처 캐릭터 프레디(Freddy)가 맥주를 즐겨 마신다는 설정에 착안한 ‘프레디 스타우트’는 스토리텔링으로 친근함을 주는 동시에 외연을 넓히는 데 기여합니다.
디자인 스튜디오 슈퍼픽션과 협업해 개발한 프레디 스타우트. 여타 수제 맥주 브랜드와 달리 디자이너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해 외연을 확장합니다. ⓒ테트라포드 브루잉
그뿐 아닙니다. 전용 서체 및 굿즈 개발, 부산 디자이너 커뮤니티와의 협업 등 테트라포드 브루잉은 디자인 중심의 브랜드 확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디자인은 타 수제맥주 브랜드와 차별화된 테트라포드 브루잉의 고유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여기서 키워드는 디자인이 아닌 ‘고유 기술’입니다. 브루잉이라는 업의 본질에 얽매이지 않고 회사의 핵심역량인 탄탄한 디자인 실력에 집중한 덕분에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 중에 하나인 ‘iF 디자인 어워드’에서 2018년 위너를 수상하기도 했죠.
명함, 메뉴판, 코스터 등 일관성 있는 디자인이 테트라포트 브루잉의 브랜딩을 강화합니다. ⓒ테트라포드 브루잉
경계를 넘나드는 강점의 진화
테트라포드 브루잉의 기반은 플러스엑스가 브랜드 경험 디자인 분야에서 쌓아 온 전문성입니다. 수제 맥주 전문가가 아니어도 집시 브루어리라는 비즈니스 구조와 협업을 통해 새로운 영역에 진출한 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러한 강점의 확장은 우연이 아니라 플러스엑스의 방향성에 가깝습니다.
플러스엑스는 2021년 12월 자체 메타버스 플랫폼을 개발해 ‘플러스엑스 쇼룸(PlusX Showroom)’을 오픈했습니다. 플러스엑스의 대표적인 프로젝트를 가상 공간에 3D로 구현한 것이죠. 유저가 원하는 순서와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설계한 1인칭 시점의 내비게이터 인터페이스가 포인트입니다. 일방적인 경험 제공을 넘어 디지털 게임처럼 직접 플레이하며 즐기도록 하겠다는 의도를 담은 것이죠. 쇼룸을 오픈하며 ‘크리에이티브와 기술의 융합’이라는 포부를 밝힌 것 역시, 새로운 기술로 한 차원 높은 경험 디자인을 제공하겠다는 의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시도가 앞서가는 방향일지, 너무 이른 건 아닐지는 시간이 지나야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새로운 시도는 기회를 탐색하고 창출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닙니다. 수제 맥주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디자인 회사의 열망이 집시 브루어리라는 창의적 해결책을 찾게 한 것처럼요. 고유 기술을 업그레이드하고 확장하는 플러스엑스의 미래가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Refer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