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인 출입금지. 오피스의 기본값입니다. 내부 직원들이 모여서 일하는 곳이기도 하고 대외비적인 정보들도 많기 때문이죠. 반면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공간도 있습니다. 쇼룸입니다. 쇼룸은 오피스와 달리 외부인을 적극 환영합니다. 목적 자체가 제품이나 서비스를 전시하고 널리 알리는 곳이어서죠.
이렇게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진 두 곳이 공존할 수 있을까요? 고쿠요(KOKUYO)라면 이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을 듯합니다. 고쿠요는 펜, 노트 등을 파는 문구 용품 브랜드인데, 단순히 문구 용품을 만드는 브랜드로 본다면 이 회사의 진면목을 놓칠 수 있습니다. 디자인적으로 혁신적인 제품들을 선보이며 업계를 선도하고 있기 때문이죠. 고쿠요가 어떤 DNA를 가진 회사인지 이해를 돕기 위해 문구류를 혁신한 예를 들어 볼게요.
먼저 모서리 지우개 ‘카도케시’. 정육면체 10개를 지그재그로 엮어 만든 모양의 지우개입니다. 모서리가 28개나 있기 때문에 지우개의 뾰족한 모서리 부분을 최대한 많이 쓸 수 있죠. 다음은 고무줄을 업그레이드 시킨 ‘와고무’. 고무줄에 리본 모양을 달아두니 고무줄만 둘러도 성의가 느껴지는 선물처럼 보입니다. 한가지 더. 측정을 더 정교하게 할 수 있는 자 ‘트루 메저’. 자에 있는 눈금 표시를 선이 아니라 면으로 바꿔 표시선 두께에 따른 오차를 줄일 수 있게 한 제품입니다.
카도케시 ©KOKUYO
와고무 ©KOKUYO
트루 메저 ©KOKUYO
이처럼 문구 용품에 진심인 브랜드이지만 고쿠요 매출에서 문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20%에 불과합니다. 매출의 50%는 공간 설계 비즈니스, 30%는 오피스 가구 제조 및 판매로부터 발생하죠. 이 두 사업은 기업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B2B 비즈니스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런 사업구조를 가진 고쿠요가 2021년 2월에 새로운 오피스를 선보였습니다. 이곳은 출입 카드를 목에 건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오피스가 아닙니다. 자사 직원 뿐만 아니라 외부인들로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이죠. 고쿠요는 어떤 이유에서 외부인 출입금지라는 오피스의 금기를 깨고 외부인도 드나들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 걸까요?
일하는 방식을 바꾸는 미래형 오피스
도쿄 시나가와에는 40년 된 고쿠요의 오피스 빌딩이 있습니다. 고쿠요는 이 오래된 빌딩의 리노베이션을 준비합니다. 그러던 와중 2020년 초 코로나19 팬데믹이 닥쳤습니다. 갑자기 많은 회사들이 재택근무, 원격근무, 혹은 재택근무와 오피스 근무를 섞은 하이브리드형 근무 제도를 실시하기 시작하죠. 일하는 방식의 변화에 적응하느라 회사도, 직원도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죠.
이러한 변화는 코쿠요에겐 더 가혹한 일이었습니다. 매출의 30%를 차지하는 오피스 가구에 대한 수요가 급감해서죠. 사무실에 출근하는 일이 줄어들자 오피스 가구 매출이 타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가 더 큰 문제였습니다. 재택근무, 원격근무 등에 적응한 기업들이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난다고 해서 과거의 방식으로 쉽게 돌아올 거 같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근무하는 방식에도 분명한 장점이 있기 때문이죠. 오피스를 오고 싶은 공간으로 바꾸지 않으면 직원들을 다시 오피스로 불러들이기 어려울 지 모릅니다. 그래서 코쿠요는 새로운 발상을 합니다.
“우리 오피스 건물 전체를 실험실로 만들어보자.”
동료 직원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생각의 폭을 넓히는 공간, 새로운 아이디어가 창출되는 공간, 업무 효율을 최대로 올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미래의 오피스’상을 제시하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2021년 2월에 선보인 새로운 고쿠요의 ‘미래형 오피스’는 어떤 모습일까요?
핵심적인 차이는 오피스 각층을 어떻게 구성했는지에 있습니다. 고쿠요의 새 오피스는 소속이나 팀이 아니라 업무 목적으로 층을 구성했습니다. 일반적인 사무직 업무는 회의를 통해 아이디어를 내거나, 동료들과 협업하거나, 집중해서 자료를 만들거나, 단순 반복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등 몇 가지 카테고리로 나눌 수 있는데, 고쿠요는 이렇게 직원들의 ‘활동’에 근거하여 각 층별로 테마가 있는 오피스를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볼게요. 4층은 와이드 모니터, 높이 조절이 가능한 책상, 기능성 의자 등 고사양의 오피스 가구를 갖추어 업무의 집중력을 높이는 환경을 조성합니다. 6층은 이벤트 혹은 발표회가 가능한 커다란 무대, 커피나 점심을 즐길 수 있는 주방, 사내 동아리 활동이 가능한 광장 등의 공간으로 구성하여 부서간 개방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곳, 동료들과 교감할 수 있는 곳으로 꾸몄습니다. 7층은 상품기획이나 개발자들을 위한 공간입니다. 제품의 디자인 및 프로토타입의 제작이 가능한 층으로 이노베이션을 촉진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었죠. 8층은 프로젝트 혹은 부서별 미팅 등 여러 멤버가 모여 업무에 관한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공간입니다. 움직이는 칸막이를 설치하는 등 인원수와 용도에 맞추어 그 때 그 때 회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 특징입니다.
6층
7층
8층
그리고 고쿠요는 이 새로운 오피스를 외부에 개방합니다. ‘미래형 오피스’에 관심 있는 기업은 언제든 견학을 요청할 수 있으며, 실제로 많은 일본 기업들이 고쿠요의 오피스를 방문하고 있죠. 그렇다면 고쿠요는 왜 오피스를 외부에 개방하는 걸까요? 외부인 출입금지가 오피스의 기본값인데 말이죠. 앞서 설명드린 매출 구성에 힌트가 있습니다. 고쿠요 매출의 절반이 ‘공간 설계 비즈니스’에서 나오기 때문이죠. 고쿠요의 오피스는 직원들의 일터임과 동시에 공간 설계 비즈니스의 홍보관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니 자사 직원들의 업무 효율성과 만족도를 높임과 동시에 공간 설계 비즈니스를 알리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릴 수 있죠.
고객 경험을 바꾸는 미래형 문구점
상호모순처럼 보이는 오피스도 쇼룸으로 만들었는데, 다른 사업부의 쇼룸을 못 만들리 없죠. 고쿠요는 오피스 건물 1층에 기업 고객만이 아니라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문구 비즈니스의 쇼룸인 ‘더 캠퍼스 숍(The Campus Shop)’을 런칭했습니다. 쇼룸이지만 우리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쇼룸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무엇이 다른지 알아보기 위해 1층의 쇼룸으로 가보겠습니다.
문구는 오피스 가구 또는 공간 설계 비즈니스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가장 큰 차이는 SKU(Stock Keeping Unit, 재고 관리 코드)가 많다는 점입니다. 쇼룸이라면 제품을 진열해서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데, 고쿠요가 생산하는 모든 문구를 다 진열하려면 아마 대형 창고라도 모자랄 겁니다. 이 딜레마가 더 캠퍼스 숍을 기획할 때의 출발점이었습니다. 더 캠퍼스 숍의 기획을 담당한 문구 사업본부의 미카미 유키(三上由貴)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죠.
“문구는 SKU의 종류가 무척이나 많고, 진열할 수 있는 장소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상품의 가치를 전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태까지는 상품의 매력을 전달하기 위해 POP를 세우거나, 작은 디스플레이 화면을 설치하거나, 매장 한 켠에 특별코너를 만드는 등 현장성을 중심으로 한 아날로그적인 접근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으로는 온라인 웹사이트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고쿠요 문구의 매력을 충분하게 전달하기가 어렵습니다.
고쿠요는 오프라인과 온라인에서 전달할 수 있는 정보의 갭을 줄이기 위해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융합한 쇼룸을 기획하죠. 그리곤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연계하는 도구로 AR (Augmented Reality, 증강현실) 기술에 주목합니다. AR이란 현실 세계에 3차원 가상 물체를 겹쳐 보여주는 기술로 ‘포켓몬고’ 게임을 연상하시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렇다면 고쿠요는 AR 기술을 어떻게 접목시켰을까요?
더 캠퍼스 숍에 들어서면 특별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냥 문구를 전시해 놓은 매장과 크게 다르지 않죠. 하지만 점포 내에 비치된 태블릿 PC를 이용하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문구점에 AR 기술이 접목되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AR MAP 솔루션’이라는 앱을 오픈한 후 태블릿을 들고 점포 곳곳을 돌아다녀 봅니다.
우선 펜과 노트가 전시되어 있는 평범함 스탠드가 보이네요. 여기에 태블릿을 갖다 대면 새로운 풍경이 나타납니다. 바닥에 마치 양탄자처럼 3 종류의 촉감이 다른 종이가 깔려 있습니다. 매끈매끈 (ツルツル), 술술 (さらさら), 까칠까칠 (ザラザラ)이라는 글자가 보입니다. 그리고 태블릿에서는 종이 위에 펜으로 글씨를 쓰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무엇인지 감이 잡히셨나요? 세 가지 다른 재질의 종이를 비교해 보는 곳입니다. AR에 등장한 종이 위를 걸으면 종이에 글씨를 쓸 때의 소리가 흘러 나와, 마치 내 발끝이 펜촉과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스탠드 위에는 실제 노트가 전시되어 있어 필기할 때의 각기 다른 느낌을 직접 체험해 볼 수도 있습니다.
ⓒ정희선
ⓒ정희선
다른 제품도 한 번 둘러 볼까요? 네 가지 종류의 풀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전시된 제품들만 보면 무엇이 다른지 알기 힘듭니다. 하지만 AR을 통해 흘러나오는 동영상을 보니 쉽게 이해가 됩니다. 사각형의 딱풀은 종이의 모서리까지 꼼꼼하게 붙일 수 있다는 점, 테이프처럼 생긴 풀은 한 손으로 이용이 가능해 작업을 편하게 만들어 준다는 점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죠.
ⓒ정희선
ⓒ정희선
악세사리 감각으로 사용하는 문구 시리즈 고쿠요메(KOKUYOME) 근처로 발길을 옮기니 일반 소비자들이 올린 인스타그램의 이미지가 AR에 등장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문구를 이렇게 코디해서 사용하고 있어요’ 라고 알려주니 자신에게 맞는 아이템과 색상을 선택하는 데 참고할 수 있습니다.
ⓒ정희선
ⓒ정희선
그뿐 아닙니다. 태블릿을 들고 특정 제품에 접근하면, 매장에 전시되어 있지 않지만 동일한 라인의 다른 제품들의 동영상을 보여주어 기능의 차이나 용도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AR 기술을 접목한 태블릿이 직원의 역할을 해주는 셈이죠. 또한 온라인 사이트와 연동되어 있어 온라인으로 구입하여 집으로 배달 받는 것도 가능합니다.
이처럼 더 캠퍼스 숍은 실물을 만져보고 사용해 볼 수 있는 현실 세계의 장점과 이미지와 동영상 등을 통해 제품에 관한 상세 설명이 가능한 디지털 세계의 장점을 혼합하였습니다. 고쿠요는 AR 기술을 활용함으로써 디자인이 다양하고 SKU가 많은 문구류를 전시하기에는 부족한 공간을 확장합니다. 같은 제품의 다른 색상, 다른 디자인을 모두 다 진열해 놓지 않아도 되는 거죠.
고객은 다양한 제품을 경험할 수 있고 제품의 감성적, 기능적 가치를 일반 점포보다 입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AR 체험 자체가 마치 게임하는 것과 같은 감각으로 재미를 전달해 줍니다. 태블릿을 들고 돌아다니다 보면 갑자기 화면에 등장하는 알파벳이나 캐릭터는 마치 보물 찾기 놀이를 하는 것과 같은 느낌도 들죠. 점포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도 공간을 줄이고, 직원을 덜 두어도 되는 등 운영비를 아낄 수 있으니 모두에게 득이 되는 방식입니다.
ⓒ정희선
미래를 키우는 개방적 마인드
고쿠요 빌딩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쇼룸입니다. 문구를 파는 더 캠퍼스 숍은 물론이고, 그 위의 오피스까지도 일하는 방식을 실험하는 장이자 공간 설계 비즈니스를 위한 쇼룸으로 구성했으니까요. 코로나19 팬더믹이 고쿠요에 시련을 주었지만, 고쿠요는 시원하게 대응하면서 오히려 새로운 사업 기회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러한 고쿠요 오피스의 테마는 ‘개방’입니다. 문구의 쇼룸 안에는 카페가 있으며 오피스 마당에도 공용 공간을 구성해 일반인 누구나 와서 편하게 쉴 수 있는 장소를 만듭니다. 문구의 쇼룸을 구경하기 위해 방문한 20대들이 카페에 앉아 쉬고 있습니다. 근처 회사의 직원들이 와서 노트북을 켜고 일을 하기도 합니다. 새로운 오피스를 견학하기 위해 방문한 정장을 입은 중년층 그룹들도 눈에 띕니다. 어디선가 많이 본 풍경이라고요?
그렇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공부하는 대학 캠퍼스를 닮았습니다. 그래서 이곳의 이름은 ‘더 캠퍼스 (THE CAMPUS)’입니다. 이는 고쿠요의 대표 상품인 ‘캠퍼스(CAMPUS) 노트’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여러가지 활동을 배우는 대학의 캠퍼스 같은 장소를 만들고 싶다는 의미를 담고 있죠. 이러한 개방성이야말로 다양한 아이디어 상품을 만들어내는 고쿠요의 원동력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