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낀 작품을 버젓이 전시하고도, 오리지널이 된 박물관

V&A 뮤지엄

2023.04.10

베낀 작품이 버젓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어요.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남몰래 베낀 것도 아니에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조각상’,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로마 시대의 ‘트라야누스 승전비’ 등 내로라하는 작품들로 가득하죠. 원작을 바탕으로 새롭게 변형한 것도 아니에요. 원작을 있는 그대로 복제했어요.


이름 모를 뮤지엄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아요. 런던을 대표하는 뮤지엄 중 하나인 ‘V&A 뮤지엄(Victoria and Albert museum)’의 ‘카스트 코트(The Cast courts)’ 관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에요. 보통의 경우 원작을 전시하는데, 어떤 연유로 V&A 뮤지엄은 카스트 코트 관을 복제품으로 가득 채워 놓았을까요?



뮤지엄은 ‘영감의 창고’예요. 그래서 이번 런던 위크에서는 V&A 뮤지엄, 코톨드 갤러리, 테이트 모던, 사치 갤러리, 스트릿 아트 등 런던의 뮤지엄을 둘러보면서 인사이트를 찾아볼게요. 오늘의 스토리는 <이제서야 보이는 런던의 뮤지엄>의 일부입니다.    


💡 인사이트를 찾기 위해 눈여겨 볼 포인트

조직 내 부족한 역량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V&A 뮤지엄 미리보기

 학교 이름은 V&A, 필수 과목은 카스트 코트

 매끄럽지 않은 다비드 상이 전시된 이유

 반으로 잘라 교육적 가치가 솟아난 기둥

 원본에 숨결을 불어넣은 원본의 원본

 켄싱턴, 뮤지엄 칼리지의 집합소




히드로 공항에서 런던 시내로 가기 위해 이동하는 차 안이었다. 눈앞으로 아름다운 고성과 붉은 벽돌 집이 스쳐 지나갔다. 어느 귀족의 사유지일까, 영국의 국회의사당이나 빅벤처럼 역사가 깃든 건물일까 궁금증을 안고 가던 길을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두 건물이 런던을 대표하는 자연사 박물관과 V&A 뮤지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런던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히드로 공항에서 차를 타고 시내 중심부로 올 때 이 두 곳을 거의 대부분 지나게 된다. 자연사 박물관과 V&A는 런던의 첫인상을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셈이다.


런던에 오면 꼭 들러봐야 한다는 말을 수십 번도 넘게 들었던 탓에 자연사 박물관은 일찌감치 방문해보았지만, 웅장한 성처럼 보였던 V&A에는 좀처럼 발길이 닿지 않았다. 내가 해설하고 있는 미술관들이 주로 시내 중심에 위치해 있어 방문할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이 쉬운 핑계거리이자 사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켄싱턴 가든 주변을 산책하다 빅토리아 풍의 V&A에 큰 마음을 먹고 들어서게 되었다.



ⓒ시티호퍼스


빅토리아 여왕과 그 남편 앨버트 공이 세운 박물관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내부를 찬찬히 관람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름다운 미술품과 도자기, 공예, 패션 등 눈길을 사로잡는 다양한 작품을 살펴보던 중 그만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아니,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이 눈앞에 생생하게 전시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어야 할 작품이 왜 여기, 런던의 한복판에 있는 걸까? 짧은 순간이지만 강렬한 호기심이 일어났다. 얼마 뒤 나는 유럽 각지에 있는 중요한 유물들이 이 박물관에 실제 사이즈로 전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이들 모두가 진품이 아니라 복사본이라는 사실을 알고 한 번 더 놀라고 말았다.


V&A의 정문에 들어서면 맨 먼저 세계적인 유리 공예가 데일 치훌리의 샹들리에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샹들리에를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작은 공간이지만 한국관이 등장하고 바로 그 옆에 카스트 코트(Cast Courts)라는 전시실이 있다. 영어 단어 ‘Cast’는 쇠붙이를 녹여 거푸집에 부은 다음 굳혀서 만든 물건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카스트 코트는 진품이 아닌 복사품, 석고본들을 한데 모아둔 전시실인 것이다. 의아했다. 얼핏 상상만 해보아도 작품을 본뜨는 과정 자체가 무척 복잡할 것 같은데, 게다가 진품이 아닌 복사품은 그 가치를 인정받기도 쉽지 않을 텐데 어째서 V&A는 대형 전시실인 카스트 코트를 운영하고 있는 걸까? 나는 그 해답을 V&A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었다.



ⓒ시티호퍼스



학교 이름은 V&A, 필수 과목은 카스트 코트

시계를 거꾸로 돌려 18세기 영국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당시 영국은 말 그대로 국제 사회의 주인공이었다. 하늘은 오로지 새들의 영역이며 사람은 사슴이나 말보다 절대 빨리 달릴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인식은, 영국이 인류에 선물한 제트 엔진과 기차의 발명으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산업 혁명 이후 세계 곳곳에 건설한 식민지, 그 식민지에서 생산된 물건들을 관리하기 위해 설립된 동인도 회사, 아편 전쟁의 승리로 얻은 홍콩까지. 영국의 상업적, 정치적, 군사적 위력은 기세등등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영국이 승기를 잡지 못한 영역이 하나 있었다. 유럽 대륙에서 탄생한 문화가 섬나라 영국에 가장 늦게 전달되면서, 영국은 문화적 변방이라는 이미지를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예술사에 큰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나라, 문화적으로 뒤처진 나라라는 오명은 영국에 따라붙은 그림자였다.


변화가 일어난 건 그 무렵이었다. 경제 성장이 폭발하자 자연스레 영국인들의 지적 호기심에 불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문화적 변방이란 이미지를 바꾸기 위한 사회적인 노력들이 일어났다. 이런 노력은 계몽주의 사상과 맞물리며 영국에 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을 탄생시켰다. V&A 역시 그 일환으로 만들어졌지만, 조금 더 특별한 스토리를 갖고 있다.


1851년 5월 1일, 런던에서 세계 최초로 만국 박람회가 열렸다. 여러 나라가 참가해 각국의 공업품, 미술 공예품 등을 전시하는 행사였지만 실상은 서구 열강의 산업화된 기술력과 예술적 우위를 자랑하기 위한 무대였다. 산업화와 기계화의 중심을 달리고 있던 영국에게는 자국 생산품의 위세를 과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영국 산업 미술 운동의 부흥을 일으켰던 헨리 콜이 기획을 맡아 뼈대를 완성하고, 교육과 문화에 조예가 깊었던 앨버트 공의 막대한 후원이 더해지면서 행사는 어마어마한 규모로 성장했다. 6개월간 600만 명의 관람객, 당시 영국 인구의 3분의 1이 런던을 방문했다.


이 산업화의 상징적인 행사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행사장의 규모였다. 수정궁이라는 이름의 회장에서 주 전시가 열렸는데 길이 563미터, 폭 124미터로 축구장 열여덟 개와 맞먹을 만큼 그 크기가 압도적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수정궁의 위용을 처음 마주한 유럽인들은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역사상 최초로 시도된, 철과 유리로 건립된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Source: 위키미디어


수정궁 이전까지 서양 건축의 패러다임은 돌과 나무였다. 우리가 유럽을 여행하면서 보는 대부분의 건축물이 돌과 나무로 이루어져 있는 이유다.


그러나 19세기 영국 과학자들에 의해 철의 연성과 탄성, 강도 등이 연구되고 주철, 강철 등 철을 제련하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철을 이용해 설계한 건물들이 점차 나타났다. 그 첫 주자가 된 것이 수정궁이었다. 철로 기본 골격을 세우고 유리로 마감을 한 덕에 건축 기간은 획기적으로 단축되었다. 분해와 조립, 재설치도 아주 용이해졌다. 근대 건축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수정궁을 기점으로 유럽에는 철과 유리로 된 건물들이 우후죽순 건축되기 시작했다. 유럽과 유럽을 잇는 기차역 또한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철과 유리로 만들어진 건물과 기차역들은 19세기 근대 유럽의 시대상을 나타내는 징표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만국 박람회는 성황리에 종료되었다. 그러나 헨리 콜과 앨버트 공의 기획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수정궁과 만국 박람회에서 선보인 생산품들처럼, 아니 그보다 더 획기적인 시대 유산을 남기기 위해서는 디자인의 기준을 높이고 시민 교육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했다. 두 사람의 의기투합은 디자인 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디자인 학교는 과학미술성이란 이름을 거쳐 1852년에 제조 물품 박물관(Museum of Manufactures)으로, 그로부터 5년 뒤 사우스 켄싱턴에 자리를 잡으며 사우스 켄싱턴 미술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초대 관장은 헨리 콜이 맡았다. 그 후 사우스 켄싱턴 미술관은 1899년에 지금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V&A이 되었다.


V&A의 역사에는 이처럼 일반 대중의 지적 호기심을 풀어주고 국민을 교육시키기 위한 학교로서의 기능이 숨어 있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그림이나 조각품만이 아니라 가구, 섬유, 패션, 도자기, 보석을 아우르는 다양한 전시품과 전시실을 만날 수 있다. V&A를 더욱 제대로 감상하고 싶다면 기존의 박물관을 관람할 때와는 조금 다른 방식을 취하는 것이 좋다. 시대순으로 전시실을 훑으며 다른 사람의 뒤를 쫓는 게 아니라 관심사에 따라 선택적으로 관람하는 것을 추천한다. 마치 대학에서 수강 과목을 신청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때 박물관을 방문한 여러분이 빼놓지 않고 꼭 신청해야 하는 필수 과목이 있다. V&A를 상징하는 전시관, 카스트 코트다.



매끄럽지 않은 다비드 상이 전시된 이유

왜 V&A는 복제품을 잔뜩 모아 놓고 보란 듯이 당당하게 전시하고 있을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이번엔 17세기 말로 시간 여행을 떠나본다. 산업화의 기운이 꿈틀거리던 당시, 영국 귀족 자제들 사이에서는 그랜드 투어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견문을 넓힌다는 목적으로 프랑스, 이탈리아, 멀리는 그리스까지 방문하는 일종의 유학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서양 철학과 역사, 예술, 건축 등을 폭넓게 공부한 학생들은 짧으면 1~2년, 길게는 10년까지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경험을 쌓았다.


하지만 이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건 소수에 불과했다. 영국 정부는 물리적 혹은 경제적으로 타국에서 공부할 수 없는 젊은이들을 위해 유럽의 주요 유적지와 유품을 본떠오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석고를 이용해 비석이나 승전비, 조각을 동일 사이즈로 본떠오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영국인 누구라도 바다 건너 대륙에 가지 않아도 유럽의 주요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이 석고본의 향연이 V&A의 카스트 코트다.


카스트 코트에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을 비롯해 카라얀 전승 기념비, 기베르티의 천국의 문 등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예술품들이 ‘복제’되어 있다. 이 지점에서 읽을 수 있는 건 19세기 영국인들의 야망이다. 산업 혁명과 식민지 지배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었으나 문화적으로는 성숙하지 못한 나라. 이 문화적 콤플렉스가 카스트 코트를 만드는 데 한 몫 했음은 분명하다. 지금부터 카스트 코트의 첫 번째 대표작, 다비드 상을 알아보도록 하자.




David, 1501-4, Michelangelo Buonarroti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은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돌팔매질하려는 순간을 포착한다. 적장 골리앗을 향한 작은 거인 다윗의 의지가 돋보인다. 단단한 두 다리와 굳건한 자세에서 안정감이, 팽팽한 근육과 핏줄에서는 젊은 육체의 힘이 느껴진다. 다비드 상은 르네상스 시대 유럽인들이 추구했던 균형과 조화, 통일과 비례를 미적으로 구현한 조각상이다. 동시에 세계를 현상계와 이데아로 나누었던 플라톤적 접근이 주입된 작품이기도 하다.


플라톤 철학을 공부한 미켈란젤로는 “나는 대리석 안에 있는 천사를 보았고, 그가 나올 때까지 깎아냈다.”라는 말을 남긴 바 있다. 신은 이미 대리석 안에 본질적인 형태를 부여해 놓았고, 그 본질을 감싸고 있는 잉여 부분을 제거하는 것이 조각가의 임무이므로 자신은 신이 내린 소명을 다했을 뿐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다비드 상에는 이데아 속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실물로 구현하고자 했던 르네상스인들의 욕망이 들어 있다.


16세기 초 다비드 상이 피렌체 공화국의 정부 청사였던 베키오 궁전 입구에 세워졌다. 피렌체는 당시 프랑스의 공격과 주변 도시 국가인 로마, 밀라노, 베네치아와의 외교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나라를 구한 애국 영웅 다윗은 피렌체 시민들에게 희망의 상징과도 같았고, 그런 다윗을 형상화한 다비드 상은 곧 피렌체 공화국의 자유와 독립, 민권을 의미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날씨에 의한 풍화와 사람들이 자행하는 훼손에 노출되자 특단의 조치가 내려졌다. 피렌체가 속한 토스카나주의 대공 레오폴트 2세는 석고 제작자 클레멘테 파피에게 복제본을 주문했다. 1857년에 복제된 다비드 상은 베키오 궁전 앞에 다시 세워졌고, 원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원본은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가게 되었다.


파피는 뒤이어 또 다른 다비드 상을 복제하게 되는데, 사연은 이렇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피렌체에 있는 도메니코 기를란다이오의 그림을 구입해 런던의 국립 미술관에 전시하려 했으나 레오폴트 2세의 불허로 계획이 틀어지게 된다. 레오폴트 2세는 여왕에게 사과와 존중을 표하기 위해 다비드 상의 복제품을 하나 더 제작하기로 한다. 파피는 5미터에 달하는 이 거대한 조각상을 본뜨기 위해 조그만 거푸집 1,500개를 사용했다. 이렇게 복제된 다비드 상의 거푸집들은 조각조각 배에 실려 영국으로 보내졌다. 복제할 때 들어간 제작 비용보다 이탈리아에서 영국까지 조각품을 실어 보내는 운송비가 더 들었다고 하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선물이었던 셈이다. 우여곡절 끝에 영국에 도착한 조각들은 하나하나 맞춰져 지금의 카스트 코트에 있는 다비드 상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V&A의 다비드 상을 자세히 보면 거푸집 연결 부분이 매끄럽지 않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다비드 상은 본래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내는 선물이었으나 여왕의 기부로 V&A에 뿌리를 내렸다. 여왕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는지, 큰 조각상을 보관할 장소가 마땅치 않아서였는지, 혹은 사람들에게 이 훌륭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걸작을 하루라도 빨리 소개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V&A에 자리를 잡고 대중에게 공개되었을 때 일으킨 충격과 찬사는 기대 이상이었다. 다비드 상은 150년이 지난 지금까지 런던 시민과 관람객들에게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영국 현대 조각가들에게도 커다란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반으로 잘라 교육적 가치가 솟아난 기둥

카스트 코트가 자랑하는 또 다른 작품은 전쟁 승전비, 트라야누스다. 로마의 황제 트라야누스가 지금의 루마니아인 다키아 지역을 점령하고 자신의 업적과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로마에 원형 기둥을 세웠는데, 이를 복제한 작품이 카스트 코트에 전시되어 있다. 대리석 기둥 20개를 이어 붙인 기둥의 높이는 무려 35미터, 지름은 3.7미터에 달한다. 여러 개의 대리석 조각을 이어 붙였음에도 절단면이 완벽해 겉으로는 하나의 높다란 통처럼 보인다. 지진이나 날씨의 영향에도 아직까지 초기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1900년 전의 조형물이라 하기에는 그 규모도 설계 방식도 놀라울 따름이다.



ⓒ시티호퍼스


표면에는 190미터에 달하는 프리즈부조물 장식가 나선형으로 돌아가며 기둥을 감싸고 있다. 프리즈에는 2,662명의 사람이 155개 장면에 나뉘어 나온다. 황제 자신은 58번이나 등장하고 루마니아의 왕, 선원, 성직자 등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도 등장해 당시 로마의 생활상을 보여 준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트라야누스 황제가 다키아를 상대로 벌인 두 번의 승리를 묘사하고 있다. 로마 군인들과 황제가 다뉴브 강을 건너가는 모습, 전쟁에서 승리하는 모습, 다치 왕의 죽음 등 전쟁 장면보다 승리 후 의식을 거행하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전쟁의 참혹함보다는 그로 인해 훨씬 더 풍요로운 세상이 열렸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정복자의 관점이 드러난다.


로마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이 기념비의 복제본은 왜, 어째서 런던으로 오게 되었을까? 이야기는 1861년 프랑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는 심한 언론 통제와 독재 정치로 부정적인 민심을 사고 있었다. 여론은 좋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업적이 후대에는 인정받게 될 것이라 확신하며, 오히려 이 자신감을 더 극단적으로 표출하기 위해 로마의 트라야누스 승전비를 복사해 파리의 루브르에 설치했다.* 그로부터 3년 뒤, 카스트 코트를 채울 조형물이 필요했던 빅토리아 여왕은 나폴레옹 3세와의 친분을 이용해 이 복사본의 내용을 또 한 번 복제할 것을 주문한다. 그 결과가 지금 V&A에서 볼 수 있는 트라야누스 승전비다.

현재 나폴레옹 3세가 카피해 만든 트리야누스 승전비는 파리의 외곽 생제르맹 앙 레 성에 부분적으로 남아있다.


카스트 코트는 트라야누스 승전비의 높은 기둥을 전시하기 위해 천장을 높이는 공사를 감행했다. 하지만 결국 기둥을 두 부분으로 나눠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전시실에 2층 난간을 만들어 사람들이 기둥의 상단부까지 볼 수 있도록 했다. 로마의 트라야누스 승전비는 더 이상 내부를 공개하지 않지만 V&A는 기둥 안에 나선형 계단을 만들어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V&A의 독특한 점은 전시물을 통해 박물관의 위엄을 뽐내거나 과시하는 게 아니라, 누구든지 예술을 감상하고 각각의 특징과 제작 과정을 알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는 데 있다. 교육을 통한 국민 계몽이라는 목표가 여전히 영국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 한자리에 모인 전 세계의 명작을 카스트 코트에서 효율적으로 둘러보는 건 어떨까?



원본에 숨결을 불어넣는 원본의 원본

르네상스의 아이콘 라파엘로 산치오의 작품도 V&A를 수놓은 별 중의 하나다. 라파엘로는 37년이라는 짧은 생을 사는 동안 바티칸에서 두 명의 교황을 모셨다. 율리우스 2세와 레오 10세가 그들이다. 먼저 1509년부터 1520년까지는 율리우스 2세의 요청으로 바티칸의 서재와 접견실, 식당 등으로 쓰였던 서명의 방, 엘리오도로의 방, 보르고 화재의 방, 콘스탄티누스의 방 등을 벽화로 장식했다. 벽화 ‘아테네 학당’으로 유명한 서명의 방 작업을 막 끝냈을 무렵, 새롭게 교황이 된 레오 10세가 라파엘로에게 시스틴 채플에 장식할 태피스트리 밑그림을 의뢰했다.


태피스트리는 벽에 거는 양탄자라고 쉽게 이해하면 된다. 예전부터 유럽의 왕가와 성직자, 귀족들은 원하는 주제로 태피스트리를 만들어 성과 교회, 저택 벽에 걸어 놓았다. 태피스트리는 제작 과정이 복잡하고 정교해 사치품에 해당할 정도로 가격이 높았고, 그래서 르네상스 군주와 귀족에게는 사회적 부와 지위를 내세우는 수단으로 쓰였다. 


또 태피스트리를 거는 벽면 대부분이 돌로 만들어진 건물이다 보니 겨울에는 한기를 막을 수 있어 실용도도 높았다. 태피스트리 제작은 캔버스에 그리는 유화와는 사뭇 다른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먼저 화가는 작은 종이에 묘사할 장면을 스케치한다. 그 후 수십 장의 종이를 접착해 큰 종이를 만들고, 그 위에 원본의 스케치를 큰 스케일로 다시 옮겨 그린다. 이렇게 태피스트리의 밑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카툰(Cartoon)이라고 한다. 채색까지 마무리하고 나면 화가는 이 카툰을 직공에게 보낸다. 직공은 카툰 아래에 종이를 대고 카툰에 묘사된 그림 선을 따라 핀으로 구멍을 뚫는다. 그러면 아래의 빈 종이에는 점선으로 이루어진 원본의 이미지가 남는다. 작업자는 이 점선으로 이루어진 이미지 위에 직공판을 댄 다음 한 땀 한 땀 베틀을 이용해 직물을 짜낸다.


이렇게 복잡한 절차를 거쳐 완성되다 보니 태피스트리는 원본과 좌우가 바뀌고, 작업 시간 또한 오래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라파엘로는 제작 과정에서 벌어지는 오류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조수들을 작업에 동원했다. 라파엘로 본인이 직접 붓을 쥐고 얼마나 그림에 참여했는지는 논쟁이 있지만, 그가 전체 구성과 실행을 책임졌고 조수들의 합동으로 조화롭게 카툰을 완성시켰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V&A는 손상되기 쉬운 카툰의 원본을 보다 생생하게 보존하기 위해 카스트 코트와는 다른 별도의 전시관에서 라파엘로 카툰을 공개하고 있다.


16세기 교황과 예술가의 관계는 단순한 후원자와 예술가, 그 이상을 의미했다. 교황은 자신이 추구하는 종교적 방향과 정통성을 과시하고 본인의 업적을 치하하기 위해 예술가와 결탁을 감행했다. 이는 레오 10세가 라파엘로에게 주문한 태피스트리의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레오 10세는 베드로와 바울의 주요 일대기 열 점을 요청했는데, 기독교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두 성인을 통해 기독교의 신성함과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성경에 묘사된 이들의 발자취를 가볍게 훑어보자.


예수가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했을 때 제자들은 예수의 전언을 따라 흩어져 복음을 전파했다. 이때 처음으로 발길을 뗀 사람이 베드로였다. 로마 제국의 심장인 로마로 향한 베드로는 1대 교황을 역임하며 복음을 전파하다 순교했다.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자였기에, 소외되고 가난한 예수의 열두 제자와는 근본적으로 사회적 위치가 달랐다. 본래는 사울이란 이름으로 기독교인들을 탄압하는 인물이었지만, 어느 날 다마스쿠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을 보고 신의 음성을 듣는 기적을 경험한 뒤로 예수를 따르게 된다. 바울은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로마로 가던 중 그리스를 경유했고, 아테네에 유럽 최초로 복음을 전파했다. 다신 사회였던 그리스는 예수에 대한 저항이 적었고, 그의 설교를 경청하며 새로운 믿음에 눈을 떴다. 베드로와 바울은 누구보다 빠르게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타지로 향했고 기독교 사회에 큰 족적을 남겼다는 공통점이 있다.


바티칸 궁전에는 라파엘로가 그린 열 개의 태피스트리가 모두 도착했지만, 원본 카툰의 경우 현재 일곱 점만이 남아 V&A에 전시되어 있다. 사실 시스틴 채플에 태피스트리가 전시된 후 약 100년 동안 라파엘로 카툰의 행방은 묘연했다. 많은 이들이 유실된 것으로 결론을 내렸는데 1623년 일부가 이탈리에서 발견되었다. 영국 왕자였던 찰스나중에 찰스 1세로 즉위했다는 직접 태피스트리를 제작하기 위해 이 카툰들을 구입하고 영국으로 이송해 왔다. 이렇게 왕실 소장품이었던 카툰은 빅토리아 여왕이 1865년 V&A에 기증하면서 박물관에 안착했다.



The Miraculous Draught of Fishes, 1515-6, Raffaello Sanzio



The Miraculous Draught of Fishes, 1515-6, Raffaello Sanzio


되찾은 카툰은 총 일곱 점이다. 네 점의 베드로 이야기에는 ①물고기 떼의 기적 ②예수의 베드로 지목 ③절름발이의 치유 ④아나니아의 죽음이 묘사되어 있다. 세 점의 바울 그림에는 ⑤총독의 회개 ⑥리스트라에서의 희생 ⑦아테네에서 설교하는 바울이 그려져 있다. V&A는 ‘물고기 떼의 기적’을 바탕으로 1640년대 영국에서 만들어진 태피스트리를 해당 카툰과 마주보게 전시해 놓았다. 원본의 카툰이 태피스트리로 완성되었을 때 느낌은 어떤지, 그 과정에서 좌우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St Paul Preaching in Athens, 1515-6, Raffaello Sanzio


V&A는 라파엘로가 전성기에 작업한 이 거대한 카툰 일곱 점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전시실 내부의 다양한 인쇄물을 통해 라파엘로가 기획한 카툰과 태피스트리가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친절히 이해시켜 준다. 작품의 전시도 중요하지만 그 제작 과정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뮤지엄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체감하게 된다.


유럽을 다니다 보면 태피스트리와 청동상을 많이 보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그 세밀한 제작 과정을 V&A를 통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얼마든지 관심 있는 분야를 손쉽게 탐구할 수 있는 시대지만 작품을 실제로 대하며 공부하는 것은 또 다른 깊이와 울림을 주는 일이다. 원본의 영혼이 남아 있는 복제품, 그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해 주는 시도가 V&A가 가진 진정한 매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켄싱턴, 뮤지엄 칼리지의 집합소

영국은 만국 박람회에서 얻은 수익으로 세계 각지의 예술품을 들여오고, 또 박물관을 세우며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문화 예술을 육성해 왔다. 그 일환으로 탄생한 V&A가 영국 국민의 미술 교육을 담당했다면, 켄싱턴 지역에는 과학과 음악 분야에서도 학교 역할을 수행하는 박물관들이 있다.


엑시비션 로드(Exhibition Road)를 중심으로 V&A의 반대편을 바라보면 자연사 박물관과 과학 박물관이 나란히 있다. 두 곳은 산업 혁명의 백과사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보의 활용부터 마차, 증기 엔진과 제트 엔진의 발명, 그리고 이 제트 엔진이 어떻게 어마어마한 중력을 거스르고 대기권 밖으로 솟아오르는 로켓으로 발전할 수 있었는지를 생생히 알려 주기 때문이다. 인류의 시작과 미래 산업의 가능성을 모두 확인해볼 수 있는 곳이다.


과학 박물관에서 나와 영국의 MIT로 불리는 명문 대학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을 끼고 왼쪽으로 돌면, 왕실이 후원하는 왕립 음악 학교가 나온다. 왕립 음악 학교의 맞은편에는 빅토리아 여왕이 남편 앨버트 공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로열 앨버트 홀이 있다. 로열 앨버트 홀은 엄밀히 말하면 박물관은 아니다. 하지만 영국 대중문화와 클래식 음악의 성전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영국 국민의 음악 수준 향상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년 여름 클래식 공연 BBC 프롬스(BBC Proms)를 개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오케스트라는 여름에 공연을 하지 않는다. 영국은 그 틈을 타 전 세계의 유명 연주자를 로열 앨버트 홀로 초청한다. 그리고 세 달 동안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성대한 클래식 축제를 벌인다. 더욱이 특별한 점은 500석을 입석으로 판매하는데 공연비가 단 돈 5파운드(약 7,500원)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덕분에 음악을 즐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렴한 가격에 세계 최고 수준의 연주를 관람할 수 있다.


두 시간의 공연이 끝나면 다양한 기념품을 판매하는데 그중 가장 놀라운 건 지휘자용 총보, 그러니까 합주에 사용된 모든 악기의 악보가 그려진 모음 악보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일반인부터 음악 전문가까지 ‘예술은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는 영국의 예술에 대한 지향점을 강력히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런던의 켄싱턴은 문화 선진국이 되기 위한 영국의 피, 땀, 눈물이 녹아 있는 지역이다. V&A에서는 미술을, 자연사 박물관과 과학 박물관에서는 근현대 문명과 과학의 발전사를, 로열 앨버트 홀에서는 모두를 위한 음악을 경험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무료로 운영되거나 아주 적은 금액만을 요구한다. 문화적 변방이란 이미지에서 탈피하기 위해, 200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영국이 얼마나 많은 투자와 시도를 반복해 왔는지를 느낄 수 있다.


로열 앨버트 홀 건너편에는 하이드 공원과 켄싱턴 가든이 붙어 있다. 이 켄싱턴 가든에는 금박으로 장식된 앨버트 기념비가 있다. 여름날 성대하게 펼쳐지는 프롬스의 음악 소리가 들려올 때면, 나는 석상 속에 깃든 앨버트 공의 표정을 상상해 본다. 흐뭇한 미소로 그 역시 음악을 즐기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Reference

 V&A뮤지엄 홈페이지

 The story of the Raphael Cartoons, Ana Debenedetti, Alessandra Rodolfo, Brett Dolman, V&A

 Art History, Michael Hatt and charlotte Klo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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