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와인 매장 내공이 보통이 아니에요. 와인을 사간 사람들이 와인을 마실 장소까지 신경을 써요. 그래서 이 와인 매장에서 구입한 와인을 주변의 1,100여개 레스토랑에서 마실 수 있게 레스토랑들과 제휴를 맺었어요. 유럽이나 미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BYO(Bring Your Own) 구조를 활용하는 거예요. 심지어 제휴된 레스토랑에는 손님이 와인을 사서 직접 들고가도 되지만 예약된 시간에 맞춰 레스토랑으로 보내주기도 해요.
이렇게 하니 고객이야 좋을 수 밖에요. 코르크 차지를 감안하더라도 비싼 와인을 싸게 마실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레스토랑은 그만큼 손해 아닐까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코로나로 고객 수 변동폭이 커져 와인 재고를 떠안는 것이 부담스럽거든요. 게다가 와인을 팔지 않는 레스토랑의 경우 이 와인 매장과의 제휴로 고객의 방문을 유도할 수 있기도 하고요.
도쿄 에비스 지역에 있는 ‘와인앳에비스’ 이야기예요. 그런데 이 와인 매장이 이런 방식까지 도입한 데는 이유가 있어요. 바로 와인 입문자를 타깃했기 때문이에요. 이들을 타깃하면 와인 매장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 걸까요?
와인앳에비스 미리보기
• #1. 메뉴판을 보는 대신 테스트를 해보세요
• #2. 38개의 카테고리만 알면 와인이 쉬워져요
• #3. 말이 아니라 맛으로 와인을 이해하세요
• #4. 와인을 마시는 공간도 취향에 맞게 선택하세요
• 매니아도 입문자부터 시작한다
이런 상황을 가정해 봅시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를 모르는 사람이 유튜브로 그의 인터뷰를 봤다가 그의 팬이 됐어요. 그래서 그에 대한 팬심으로 책을 사기로 했어요. 그런데 검색을 했더니 저서가 40권은 족히 넘네요. 이렇게 많은 책이 있으면 무슨 책부터 봐야 하는지 혼란에 빠지게 되죠.
이번엔 또 다른 상황을 설정해 볼게요. 추리소설 장르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 우연히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라는 책을 읽고 추리소설 장르에 빠지게 됐다고 해보죠. 다른 추리소설을 읽어보려고 검색을 했는데, 추리소설 장르의 책이 너무 많아 무엇부터 읽어야 할지 엄두가 안 납니다.
어떤 작가에 혹은 어떤 장르에 입문하는 사람들이 겪는 불편함이에요. 이런 분들을 위해 도쿄에 있던 ‘마루노우치 리딩 스타일’ 서점에서 프로모션 이벤트를 진행했어요. 불황을 견디지 못하고 지금은 이 서점이 사라졌지만,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에 책을 팔기 위해 시도했던 기획은 여전히 참고할 만해요.
‘최초의 한 권’
해당 분야에 관심이 생겼다면 ‘이 책부터 보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하는 프로모션 이벤트예요. 어떤 작가 혹은 장르에 관심이 생겼는데 너무 많은 선택지가 있어 역설적으로 선택을 못하고 이탈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입문자가 무사히 작가 혹은 장르의 팬이 될 수 있게 친절하게 돕는 거죠.
물론 기존 고객에게 제품을 파는 게 신규 고객에게 파는 것보다 마케팅비가 적게 들어요. 그렇다해도 신규 고객을 외면할 수는 없어요. 신규 고객을 유입해야 매출이 커질 수 있으니까요. 마루노우치 리딩 스타일이 일회성 프로모션 이벤트로 책 입문자에게 다가갔다면, 아예 입문자를 타깃으로 사업을 하는 매장도 있어요. 이번에는 책은 아니고 와인이에요.
#1. 메뉴판을 보는 대신 테스트를 해보세요
맛집과 분위기 있는 카페가 즐비한 도쿄의 에비스 지역. 여기에 ‘와인 앳 에비스wine@EBISU’라는 와인바가 있어요. 가게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와인이 가득한 숍이 있고 정면 안쪽으로 스탠딩 테이블을 포함하여 약 12개의 테이블이 놓여 있어요. 20~25명 정도가 즐길 수 있는 아담한 바죠.
이곳에서 와인을 주문하려면 메뉴판을 보고 와인을 고르는 대신, 먼저 테스트를 진행해야 해요. 스마트폰으로 QR코드를 읽어 와인 앳 에비스의 진단 서비스인 와인 앳 카르테(wine@KARTE)의 15개 질문에 답을 하면 되죠. 와인 메뉴를 선택하기 위한 목적이지만, 와인을 전혀 몰라도 답할 수 있는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우선 초반부 질문은 화이트 와인, 레드 와인별로 얼마나 과즙이 풍부한 맛을 좋아하는지, 마실 때 느낌이 가벼운 와인을 선호하는지 혹은 무거운 와인을 선호하는지 등 전반적인 와인 맛에 대한 취향을 물어요. 와인을 평소 많이 마셔보지 않았더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술의 맛이나 향을 바탕으로 답하면 돼요.
ⓒwine@EBISU
초반부 이후에 나오는 질문들은 더 쉬워요. 두 개의 음식을 보여주고 이 중에서 어떤 음식을 선택할 것인지를 물을 뿐이에요. ‘표고버섯 조림’ vs ‘계란말이’, ‘야채 튀김’ vs ‘생선튀김’, ‘국물이 진한 라멘’ vs ‘국물이 시원한 라멘’ 등 두 가지 음식 중에 하나를 고르면 되죠. 단순해 보이지만 와인에 정통한 소믈리에 여럿이 감수하여 만든 질문 리스트예요.
ⓒwine@EBISU
#2. 38개의 카테고리만 알면 와인이 쉬워져요
여기까지는 요즘 종종 볼 수 있는 개인화 혹은 맞춤화 진단 테스트처럼 보여요. 하지만 와인 앳 에비스에는 차별적인 포인트가 있어요. 바로 자체적으로 구축한 ‘와인을 카테고리화하는 방법’이에요.
와인 앳 에비스에서는 와인의 맛을 화이트 13종, 레드 13종, 로제 4종, 스파클링 8종으로 분류한 후 번호를 매겨서 관리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레드 와인이라면 ‘R01: 가벼운 챠밍계’, ‘R02: 화려한 레드베리계’ 와 같은 식이에요. 진단 테스트를 끝내면 테스트를 한 사람이 좋아할 것 같은 와인 Top 3를 이러한 번호로 알려주죠.
ⓒwine@EBISU
이렇게 하니 와인바에서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져요. ‘나는 레드 5번, 화이트 6번’, ‘나는 화이트 3번, 로제 4번’ 등 이런 식으로 자기의 취향을 같이 온 사람에게 공유하는 거죠. ‘카베르네 소비뇽’ 같은 어려운 와인 이름 대신 와인을 번호로 부르자 여태까지 어렵다고 느꼈던 와인에 대한 허들이 단번에 내려가요.
ⓒ정희선
또한 와인 앳 에비스는 자체적으로 구분한 카테고리를 명함 카드 크기로 제작해 비치해 놓았어요. 카드를 보면서 테스트 결과에서 자신에게 추천되지 않은 와인에 대해서 알아볼 수도 있고, 자신에게 추천된 와인의 카드를 가져가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릴 수도 있죠. 카테고리를 시각화, 시그니처화 한 거예요.
ⓒwine@EBISU
ⓒ정희선
카드에서는 번호별로 와인의 특징을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는데요, 설명에도 전문 용어는 들어가 있지 않아요. 화이트 2번W02의 경우, 맛의 이미지는 아로마틱, 프루티, 향의 이미지는 복숭아, 살구 등 이런 식으로 향과 과일을 통해 와인의 느낌을 설명하고 있어요. 게다가 어떤 산지의 품종이 화이트 2번 와인에 속하는지 적혀 있기 때문에 이 카드만 있으면 나중에 와인 숍에 가서도 쭈뼛거릴 일 없이 당당하게 와인을 고를 수 있죠.
#3. 말이 아니라 맛으로 와인을 이해하세요
온라인으로 테스트해서 와인을 추천받는 거라면 고객이 굳이 오프라인 바를 방문할 이유가 없겠죠. 그래서 와인 앳 에비스는 이곳을 온라인 테스트 결과를 체험해 보는 장소로 설계했어요.
매장에는 24대의 와인 서버가 설치되어 있어요. R01, W01 등 각각의 카테고리를 대표하는 와인들을 유료로 시음할 수 있죠. 추천받은 와인을 그 자리에서 마셔보고 실제로 자기 입맛에 맞는지 확인할 수 있는 거예요. 서버에 설치한 와인 위에는 와인을 설명하는 카드가 비치되어 있어 따로 이름을 기억해 둘 필요도 없어요.
ⓒ정희선
와인의 용량도 잔당 20ml로 시음과 어울려요. 같은 종류의 와인을 많이 마시기보다 다양한 와인을 경험할 수 있게 용량을 정한 거예요. 와인 한 잔을 마시려면 코인 1개가 필요한데, 코인 1개는 275엔(약 2,750원)으로 부담이 없죠. 여러 잔을 마시기 위해 코인 6개를 사면 코인 1개를 추가해줘 총 7개의 코인을 받을 수 있으니 가격 부담이 더 줄어들어요.
ⓒ정희선
와인을 마시고 끝이 아니에요. 와인을 마신 후 자신이 마신 와인에 대해 온라인에서 점수를 매길 수 있어요. 5점 척도의 별마크로 마신 와인을 평가하면, 이를 인공지능이 분석해 다시 내 취향에 반영해요. 시음을 통해 취향의 정확도를 높여가는 거예요. 취향과 맞는다고 답한 고객이 80% 정도 되니 정확도가 꽤 높다고 볼 수 있어요.
여기에다가 시음을 위한 와인은 2주에 한 번씩 바뀌어요. 와인 앳 에비스에서는 개별 와인이 아니라 카테고리를 중심으로 추천하는데요. 그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다양한 와인 중에서 하나를 선정해 2주마다 교체하니, 주기적으로 새로운 와인을 마셔볼 수도 있죠.
#4. 와인을 마시는 공간도 취향에 맞게 선택하세요
와인 입문자로서 와인 시음을 통해 자신과 잘 맞는 와인을 찾았다면, 이제 구매하고 싶지 않을까요? 그래서 와인 앳 에비스의 매장 입구에는 와인을 판매하는 코너가 있어요.
이곳에는 850여 개의 와인이 있는데요, 이 와인들을 와인 앳 에비스에서 자체 개발한 카테고리별로 구분해서 진열했어요. 하나의 카테고리에 평균 20개 정도의 와인이 보기 쉽게 진열되어 있어 자신의 취향을 저격한 카테고리 내에서 가격이나 라벨 디자인을 보면서 구입하면 돼요.
ⓒ정희선
와인 입문자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객단가가 높은 편이에요. 편의점이나 마트에서는 1,000~2,000엔(약 1~2만원)짜리 와인을 마시던 사람들이 이곳에선 3,000~6,000엔(약 3~6만원0 수준의 와인을 주로 구매해요. 물론 더 높은 가격대의 와인을 구매하는 경우도 있고요. 와인의 맛에 대한 확신이 지갑을 열게 만드는 거예요.
더 흥미로운 점은 매장 밖에 있어요. 와인 앳 에비스에서 구입한 와인을 도쿄 지역의 1,000여 개 레스토랑에서 마실 수 있게 레스토랑들과 제휴를 맺었어요. 유럽이나 미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BYO(Bring Your Own) 방식을 활용하는 거예요. 제휴된 레스토랑에는 와인을 직접 들고가도 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예약된 시간에 맞춰 레스토랑으로 보내 주기도 해요.
이렇게 하니 레스토랑에서 마시면 1만엔이 넘는 와인도 와인 앳 에비스에서 4천엔약 4만원 정도에 구입할 수 있어요. 2천엔약 2만원 정도의 와인 반입료를 고려해도 4천엔 정도 절감하면서 자신의 취향에 맞는 와인을 맛있는 음식과 즐길 수 있는 거죠. 그렇다면 레스토랑은 그만큼 손해 아닐까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레스토랑 입장에서도 와인 재고를 떠안는 것이 부담스러운 일이거든요. 또한 자체적으로 와인을 팔지 않는 레스토랑의 경우 와인 앳 에비스와의 제휴를 통해 고객의 방문을 유도할 수도 있고요. 그래서 초기에는 150여 개의 레스토랑과 제휴를 맺었지만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제휴처가 1,000여개로 급격히 확대됐어요.
매니아도 입문자부터 시작한다
와인 앳 에비스는 와인 입문자로 타깃을 좁혔어요. 그리고는 해당 타깃의 입맛에 맞게 서비스와 매장을 구성했죠. 와인 입문자를 위해 와인 앳 에비스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다시 한번 요약 정리해 볼게요.
우선 와인을 무작정 고르게 하지 않고 테스트를 통해 와인 선택을 도와줘요. 또한 자체적으로 개발한 카테고리로 와인을 분류해 다양한 와인을 유형화해서 이해할 수 있게 했어요. 여기에다가 시음에 적합한 용량과 가격으로 와인을 즐길 수 있도록 설계해 추천된 와인이 실제 입맛에 맞는지 확인해 볼 수도 있고요. 그리고 고객 평가를 다시 알고리즘에 반영하면서 추천 시스템을 고도화하고 있죠.
그뿐 아니에요. 와인 앳 에비스는 젊은 세대들이 와인에 입문하면서 와인을 보다 가볍고 즐겁게 체험할 수 있게 SNS에 올리고 싶은 요소를 곳곳에 배치했어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와인 앳 에비스 운영사인 ‘브로드엣지웨어링크’의 임원 하시모토가 닛케이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설명을 들어볼게요.
“IT 업계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업계에서 어떻게 하면 고객들의 경험이 즐거워질지를 생각해 UI, UX를 개발하고 있어요. 하지만 와인 업계에서는 아직 이러한 고객 경험이 고려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어요. 우리는 그 점을 파고들었고 SNS에 올리고 싶은 요소를 곳곳에 넣었습니다.”
-〈닛케이 크로스 트렌드〉인터뷰 중
이러한 시도는 효과가 있었어요. 팔로워 수가 12만 5천명에 이르는, 데이트 장소를 주로 소개하는 일본의 인플루언서인 미즈키오코가 와인 앳 에비스의 동영상을 인스타그램과 틱톡에 올렸는데요. 해당 동영상이 50만 가까운 조회수를 기록하며 Z세대 사이에서 와인 앳 에비스의 인지도가 단숨에 올라갔어요. 인플루언서뿐만 아니라 이곳저곳에서 젊은 고객들이 저마다의 시선으로 사진찍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죠.
와인 입문자에 초점을 맞춘 결과는 어땠을까요? 와인 앳 에비스를 방문하는 고객의 70%가 대학생을 포함한 Z세대예요. 참고로 에비스 지역은 대학가가 아니에요. 주말이면 20여 석이 항상 꽉 차고, 많은 날은 하루에 100명 이상이 매장을 찾아 테이블을 5번 정도 회전시키기도 하죠.
와인 앳 에비스를 보면, 잊고 있었던 당연한 진리가 떠올라요. 매니아도, 전문가도, 헤비 유저도 모두 처음에는 입문자였다는 걸요. 그래서 입문자를 위한 비즈니스가 매력적인 게 아닐까요.
Refer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