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테일 업계만큼 다이나믹한 변화를 겪는 산업이 또 있을까요? 오프라인 매장의 전성기를 지나 오프라인이 온라인에 자리를 뺏기는 듯 하더니, 이제는 다시 업종을 막론하고 물리적 매장의 중요성이 자리를 되찾았죠.
이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오프라인의 진화예요. 오프라인에는 온라인이 대체할 수 없는 가치가 있거든요. 오프라인 매장은 사람들을 모으는 힘이 있어요. 그리고 온라인에서는 불가능한 '경험'을 구현할 수 있죠. 지식, 커뮤니티, 디자인, 심지어 야시장까지 품어 남다른 고객 경험을 디자인한 사례들을 함께 살펴 볼까요?
1️⃣ 놀리지 캐피탈
‘하우스 비전’이라는 전람회가 있어요. 집을 ‘산업의 교차점’으로 바라보고 물류, 통신, 식문화 등 각 산업의 미래가 주거의 미래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전시하는 거예요. 2011년에 일본에서, 당시 니폰 디자인센터 디자이너이자 무인양품 아트 디렉터였던 하라 켄야가 시작했고 2022년에는 한국에서도 열렸어요.
이 전람회의 차별적 관점은 두 가지. 하나는 집을 여러 산업이 집결되어 있는 ‘산업의 교차점’으로 본 점,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각 산업의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선보이면서 일상의 변화를 상상해본 점이에요. 미래의 생활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전시죠. 하지만, 전람회 기간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어 상시로 보긴 어려워요.
하우스 비전 전람회가 상시로 열리지 않는다고 해서, 미래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일시적으로 내려놓을 필요는 없어요. 오사카에 가면 21개 브랜드가 제안하는, 미래의 일상을 경험할 수 있는 ‘퓨처 라이프 쇼룸’이 있거든요. 그런데 이 쇼룸에 가기 전에 더 큰 그림을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바로 지식 자본을 쌓기 위해 만든 공간인 ‘놀리지 캐피탈(Knowledge capital)’을 알아야 하죠.
2️⃣ 더 커먼즈
방콕에는 수상한 쇼핑몰이 하나 있습니다. 건물 전체 면적의 약 30%에 이르는 면적을 공공 공간에 할애했어요. 말 그대로 공공 공간이라 쇼핑몰에서 꼭 무언가를 구매하지 않아도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에요.
게다가 이 공간은 수직, 수평으로 뻥 뚫려 비워져 있어요. 집객을 위해 무언가를 설치하지도, 팝업 매장을 열지도 않아요. 다만 계단처럼 디자인해 건물 내부 이동을 도울 뿐이죠. 매출을 위해 인기 매장들로 몰을 꽉 채워도 모자랄 판에 왜 이렇게 무료로 공간을 놀리는 것일까요?
“우리의 의도는 커뮤니티를 먼저 조성하고, 그 다음에 몰을 짓는 것입니다. (Our intention is to build first a community, then a mall.)”
수상한 쇼핑몰의 정체, ‘더 커먼즈’의 슬로건이에요. 커뮤니티를 만들어 집객 효과를 누리겠다는 거예요.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어려운 걸 해냈어요. 벌써 7년째 운영하고 있고, 2020년에는 두 번째 지점까지 냈죠. 더 커먼즈가 사람들을 모으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3️⃣ 숙시암
방콕하면 떠오르는 로컬 씬(Scene) 중 하나는 ‘시장’이에요. 전통의 강호 ‘짜뚜짝 시장(Chatuchak Market)’부터 비교적 최근 뜨기 시작한 ‘쩟페어 시장(Jodd fairs market)’, 수상 시장인 ‘담넌 사두억(Damneon Saduak)’이나 ‘암파와(Amphawa)’ 등 방콕의 시장하면 떠오르는 곳들이 한 둘이 아니예요. 각 시장마다 특색과 볼거리가 다르면서도 방콕 특유의 로컬 분위기를 물씬 풍겨 관광지로도 유명하죠.
그런데 이런 시장들의 단점이 하나 있어요. 바로 위생 문제예요. 각 개별 상점의 의식 문제이기도 하지만, 야외라는 환경과 열악한 인프라 때문이기도 해요. 게다가 수상 시장의 경우 시내와 거리가 멀어 한참을 차를 타고 나가야 하는 불편함도 있고요. 그런데 이런 문제를 해결한 곳이 있어요. 바로 아이콘시암 백화점의 지하1층에 들어선 ‘숙시암’이에요.
숙시암은 로컬 시장을 백화점 푸드코트로 구현했어요. 면적만 무려 15,000㎡, 4,500평이 넘는 규모예요. 컨셉을 야시장으로 잡고 흉내만 낸 정도가 아니라, 야시장을 통째로 옮겨 놓았죠. 어느 정도 스케일인지 함께 가볼까요? 참고로 방콕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했을 정도예요.
4️⃣ 디자인 오차드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iF 디자인 어워드’, ‘IDEA’는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로 손꼽혀요. 그 중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는 수상작들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레드닷 디자인 뮤지엄]’을 운영하고 있어요. 이 레드닷 디자인 뮤지엄은 전 세계에서 단 2곳 뿐인데, 하나는 독일의 에쎈이라는 도시에 위치해 있고, 또 하나는 바로 싱가포르에 있어요.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는 1955년 독일에서 시작되었어요. 독일에 첫 번째 레드닷 디자인 뮤지엄의 문을 연 건 당연해 보이죠. 그런데 왜 레드닷 디자인 뮤지엄의 두 번째 위치로 싱가포르를 선택한 것일까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 전략적, 문화적 이유가 있어요.
싱가포르가 지리적으로 아시아와 유럽을 사이에 위치해 있기도 하고, 도시 계획과 건축적 관점에서 레드닷 디자인 뮤지엄을 세우기에 손색 없는 것도 맞아요. 그런데 무엇보다, 싱가포르가 글로벌 디자인 허브로 인정 받고 있기 때문이에요. 싱가포르 정부와 싱가포르 디자인 협회 등의 국가 기관에서도 싱가포르의 디자인과 창의 경제를 적극적으로 육성하고자 해요. 국가적 차원에서 디자인 산업을 키우는 거죠.
2019년, 또 한 번 싱가포르에 디자인 랜드마크가 문을 열었는데요. 이번에는 디자인 산업을 육성하는 ‘리테일’ 매장이에요. 그것도 싱가포르의 대표적인 쇼핑 구역 오차드 로드예요. 각종 백화점과 쇼핑몰들이 치열하게 다투는 이 지역에서, 단 2.5층짜리 쇼핑몰로 단단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싱가포르의 디자인 산업과 디자이너들을 양성하고 있죠. ‘디자인 오차드’라는 이름의 이 쇼핑몰은 과연 어떻게 싱가포르 디자인의 미래를 인큐베이팅하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