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은 칼보다 강하다.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사상과 저술은 무력보다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력을 끼친다는 뜻이에요. 역사상 거대 힘을 가진 독재자나 정복자들이 종교, 정치적 이유로 행한 ‘금서와 분서’가 인류 역사 초기부터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죠.
기원전 3세기 중국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분서갱유, 1933년 히틀러 나치 정권이 일으킨 베를린 도서관 분서, 1966년 중국 마오쩌둥 문화대혁명 분서 사건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어요. 종이책을 보유하기만 해도 죄가 되는 시절, 당시 현존하던 대부분 책이 불길의 재가 되어 사라졌지만, 책은 죽지 않았어요. 목숨을 걸고 책을 지키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진시황의 분서갱유 사건 때 수많은 지식인이 중국 후난 대유산(大酉山)과 소유산(小酉山) 동굴에 책들을 숨겼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훗날, 이곳에 있는 책으로 지식을 쌓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해지며 두 산을 가리키는 ‘이유(二酉)’는 풍부한 지식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됐죠.
여기서 모티브를 얻어 탄생한 이유 서점(二酉书店)은 2021년 5월 1일, 오픈하자마자 상하이 신흥 핫플레이스 구역인 신천지에서 꼭 가봐야 하는 명소 10위 내 이름을 올렸어요. 트렌디한 레스토랑과 바, 상점들 속에서 서점이 존재감을 드러낸 비결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이유 서점 미리보기
• 몰래 책을 숨기던 곳, 이제는 문화를 지킨다
• 서점 안에 2개의 산과 우물이 있다고?
• 책을 병풍 삼아 술을 마시는 근사한 기분을 판다
• 사람들을 연결하는 서점, 서점의 커뮤니티화
• 넘쳐나는 콘텐츠의 시대, 서점이 필요한 이유
상하이 스카이라인이 화려해요.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빌딩은 압도적인 높이와 역동적인 건물 외형으로 이목을 끄는 상하이 타워죠. 총 127층 높이로 118~121층에 상하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각각 설치되어 있는데, 입장료는 180위안(약 3만 3천원)이에요.
이 가격이 조금 비싸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52층으로 향하기 시작했어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서점이라 불리는 ‘도운 서원(朵云书院)’ 플래그십 스토어가 같은 건물 52층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에요. 약 239m 높이에 위치한 이 서점은 구름 한 점(一朵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상하이의 하늘과 도시를 스카이뷰로 조망할 수 있어요.
최대 350명으로 인원 제한을 하며 100% 예약제로만 운영하는 서점인데요. 50~90위안인 커피나 디저트 값을 내면, 테라스 창가에 앉아 상하이 도시를 내려다볼 수 있어요. 자릿수 제한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은 테라스 자리가 나길 기다리며 서점에서 책 구경을 하거나 기념품을 구매하곤 해요. 보통 지하나 1층에 있는 서점을 공중으로 끌어올려, ‘전망'이란 부가가치를 더해 서점에 관심 없는 사람도 찾아올 수 있도록 한 거예요.
이곳의 컨셉 기획과 인테리어를 맡은 건축 사무소는 ‘우토피아 랩(Wutopia Lab)’이에요. 중국 전역에 크리에이티브 건축물을 설계해 왔는데, 특히 중국의 아름다운 서점들을 도맡아 진행했죠. 그렇다면 이 건축사무소는 왜 이렇게 서점에 진심일까요? “단순히 책을 파는 공간을 넘어서, 책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오게 만드는 라이프 스타일 공간을 만드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이에요. 이러한 비전을 가지고 최근에 런칭한 서점이 바로 상하이 ‘이유 서점’이에요.
몰래 책을 숨기던 곳, 이제는 문화를 지킨다
상하이 신천지(新天地)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청사가 위치했던 지역이에요. 한국인 여행객들에게도 익숙한 곳이에요. 2021년 4월, 이곳엔 더 루프(The Roof)란 이름으로, 투명한 유리 지붕을 얹은 한 건축물이 들어섰는데 세계적 건축가 장 누벨(Jean Nouvel)이 설계했어요.
그런데 이 건물, 가만 들여다보면 독특해요. 외관은 아이보리 색으로 칠해 주변 채도가 낮은 다른 건물과 이질감 없이 어울리다가, 안으로 꺾는 지점부터는 온통 빨간색을 칠해 빨려 들어가는 느낌으로 입구가 설계되어 있어요. 뚜렷이 대비되는 색 배치를 통해 새것과 옛것, 안과 밖을 충돌시키며 외부 세계에서 내부 세계로 안내해요.
상하이 신천지 The Roof 건물 ©ASPECT Studios
The Roof 건물 내 이유 서점 입구 ©Wutopia lab
더 루프의 1층에 이유 서점(二酉书店)이 들어서 있어요. 진시황 시절의 분서갱유 때 피신한 학자들이 책을 숨긴 곳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대유산과 소유산을 서점으로 공간화했죠. 대유산과 소유산을 합친 말이 이유(二酉)인데요. 여기서 비롯된 사자성어인 서통이유(书通二酉)는 직역 시엔 ‘대유산과 소유산까지 책으로 잇다, 통한다' 란 뜻이고, 장서가 아주 많음을 비유할 때 쓰여요.
또한 이유(二酉)는 맥이 끊길 뻔한 책들이 숨겨진 공간으로, ‘문화의 영속성'이란 상징을 가지고 있기도 해요. 더 루프와 이유 서점을 비유적인 맥락으로 본다면, 디지털 콘텐츠의 범람으로 암묵적인 분서갱유가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유 서점은 책이 존재하는 공간으로 계속해서 문화와 역사를 이어간다는 상징으로도 해석할 수 있어요.
서점 안에 2개의 산과 우물이 있다고?
소유산으로 들어가는 길 ©Wutopia lab
하얀 인공석으로 만든 소유산이 서점의 입구예요. 하얀색 입구 우측엔 조명을 받아 ‘소유산(小酉山)’이란 글자가 은은하게 드러나면서 어둠 속 환한 빛이 있는 동굴로 들어가는 느낌을 조성해요. 바깥에서 명백히 보이는 산이라고 해서 이곳을 ‘보이는 산'이라고 불러요. 공간 한가운데엔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천연목 테이블과 커다란 책이 펼쳐져 있죠.
소유산 옆 우물 ©Wutopia lab
소유산 옆 공간엔, 우물이 배치되어 있어요. 산과 우물의 배치는 중국 유명 당나라 시 구절인 ‘산이 높아 명산이 아니라, 신선이 살면 명산이 된다. 물이 깊어서 신성한 연못이 되는 게 아니라, 용이 살면 신령스러운 연못이다(山不在过,水不在深)’를 은유한 거예요.
동굴 지형을 떠올리게 하는 대유산 ©Wutopia lab
버건디 색 천공 알루미늄 패널로 공간을 구획 ©Wutopia lab
우물을 지나면, 주요 공간인 대유산으로 이동할 수 있는데요. 이때 이미 산 안에 들어와 있어, 산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없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 산’이라고 불러요. 흰색 소유산에서 내부로 들어가면 버건디 색의 천공 알루미늄 패널이 창과 책꽂이를 형성하며 공간 전체를 구성해요.
구멍이 뚫린 패널로 공간 구획을 답답하지 않게 나누었는데, 빈 공간에는 녹색 식물을 배치하면서 자칫 삭막할 수 있는 공간에 따뜻함을 더했어요. 이는 “걸음마다 다른 풍경이 있다(步步有景)”는 중국 전통 정원 요소를 반영한 결과이기도 해요.
이유 서점의 장서량은 약 15,000권. 보통 대형 서점이 10~30만 권 이상 장서량인 것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장서량을 가지고 있어요. 주요 책 카테고리는 건축, 문학, 사회 과학, 예술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장 잘 팔리는 학습이나 어린이 책, 실용 경제 서적은 보유하고 있지 않아요.
작은 독립 서점이라고 보기엔 규모가 크고, 비싼 핫플레이스 상권에서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를 영위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여요. 그렇다면 이유 서점은 어떻게 유지되는 걸까요? 이유 서점의 수익 모델은 앞서 소개한 상하이 타워 52층에 위치한 도운 서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어요.
책을 병풍 삼아 술을 마시는 근사한 기분을 판다
도운 서원은 황푸강을 바라보는 공중 전망 요소를 더해 서점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예약까지 하며 찾도록 만들었어요. 예약은 1인 1 계정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함으로써 서점 방문객들의 데이터를 최대한 수집하고요. 책 판매 기록, 책을 구매하는 고객과 구매하지 않은 고객 데이터 비교 분석 등을 통해 책 재고 관리 및 마케팅 활동에 참고하기도 하죠. 책을 구매하지 않아도, 이곳을 찾는 고객들은 대부분 상하이 타워 전망대 대신, 합리적인 가격으로 전망을 즐기려는 목적으로 방문하기 때문에 책이 아니더라도 음료나 기념품 판매 등으로 수익을 올릴 수 있어요.
이유 서점도 책 판매 외의 매출이 50%를 차지해요. 구체적으로 보면 책 판매가 50%, 음료 판매가 30%, 기타 문화 이벤트가 20%로 구성돼 있죠. 도운 서원은 도시 조망이란 메리트가 있어서 음료가 잘 팔린 건데 이유 서점은 어떤 방식으로 음료를 팔았길래 전체 매출의 30% 이상을 차지한 걸까요?
공간 중심에 위치한 바 ©Wutopia lab
이유 서점의 대유산 한 가운데엔 반원형으로 둥글게 자리 잡은 바 테이블이 있어요. 낮에는 전문 바리스타가 커피를 내려주는 카페에요. 이곳에서 구매한 책이나 소장한 책을 들고 와 커피와 함께 즐길 수 있죠. 이 정도만 들으면 우리 주변에서도 볼 수 있는 서점과 카페가 공존하는 흔한 풍경으로만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이 공간의 매력은 서점 영업 마감 시간인 밤 8시 반 이후에 펼쳐져요. 근사한 바로 변신하거든요. 음료가 커피에서 술로만 바뀌었을 뿐인데, 낮과 밤의 풍경은 사뭇 달라져요. 서가 조명이 어두워지고, 서점 중앙에 놓인 바 테이블에 혼술을 즐기는 사람부터 지인들과 수다를 떠는 사람들이 가득 차면, 이곳의 메인 공간이 서점이 아닌 ‘바'가 된 느낌이에요.
이유(二酉) 한자를 다시 한번 살펴볼까요? 앞의 二 에 점 하나만 더 찍으면 물을 가리키는 삼수변 氵을 만들 수 있어요. 여기에 뒤의 酉를 붙이면 술을 가리키는 주(酒)에요. 또한, 옛사람들이 시를 읽고 지을 때 술을 함께 곁들였다는 점에서 착안해 밤이 되면 술을 팔기 시작한 거예요.
2023년에 들어서서 이 공간은 조금씩 확장됐어요. 퇴근 후 이곳에 술 한 잔 시키고 업무를 보거나 공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바 테이블 뒤에 추가로 책상과 의자를 배치해 작업 공용 공간처럼 꾸몄어요. 커피나 술 음료를 주문하면 콘센트와 Wifi 등을 갖춘 자리를 시간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죠.
카페와 바, 그리고 작업 공간을 서점 사이드 공간에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정중앙에 둬, ‘공부하기 혹은 일하기 좋은 카페 & 바’ 분위기를 조성해 사람들을 불러들였어요. 물론, 책 구매보단 자리 이용을 하기 위한 목적이 크지만, 시간을 보내기 위해 서점에 방문한다는 행위를 유발하기 위해 고객들의 라이프스타일을 공간에 녹인 거죠.
사람들을 연결하는 서점, 서점의 커뮤니티화
서점에서 진행하는 원데이 클래스 ©二酉书店
서점에서 진행하는 원데이 클래스 ©二酉书店
이유 서점은 매주 위챗을 통해 해당 달 문화 이벤트 정보를 발송해요. 매달, DIY 애프터눈티 클래스, 바리스타 클래스, 칵테일 클래스, 와인 클래스 등 각종 식음료 관련된 클래스부터 독서 모임, 심리 관련 워크숍 등 매일 낮 혹은 저녁 시간대에 진행하는 이벤트들이 가득해요.
모임을 위한 회의 공간뿐 아니라 카페 & 바 주방이 있기 때문에 다룰 수 있는 클래스 범위가 넓어요. 주로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인기가 많은 식음료 클래스는 특성상 카페나 바 등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유 서점엔 이미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클래스를 포함해 다양한 주제로 클래스를 접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에요.
클래스를 진행하는 공용 공간 근처 서가엔 커피와 차, 주류 관련한 서적과 매거진을 배치해 자연스레 책 판매로도 연결해요. 판매 대상을 ‘책' 자체 보단 책을 통해 얻게 되는 효용 가치인 ‘지식과 경험'에 초점을 맞춰 서점의 역할을 자기계발하는 문화 공간으로 확장한 거에요.
헌책교환 이벤트 ©二酉书店
눈여겨볼 만한 이벤트로는 주기적으로 진행하는 헌책교환회도 있어요. ‘표류하는 책장’이라고 불리는 공간에 더 이상 읽지 않는 책을 들고 와 ‘이 책을 들고 온 이유’와 함께 날짜를 유리병 모양의 메모지에 기재해요. 이후 이 메모지를 찍어, ‘헌책 교환 모임 위챗 그룹 채팅방’에 공유한 후, 책을 두면 돼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두고 간 헌 책 중 마음에 드는 책을 들고 갈 수 있어요. 이 이벤트에 참가하기 위해선 커피나 차를 구매해야 하는데, 음료 구매로 공간 이용도 할 수 있기 때문에 부담이 없어요. 오히려, 커피 1잔의 가격으로 새로운 책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기 때문에 호응도 좋은 편이죠.
헌책교환회를 하면서 이유 서점은 책을 직접 판매하진 않지만, 위챗 그룹 채팅방에 공유되는 헌 책 공유 리스트를 통해 방문하는 고객들의 책 취향을 수집하면서 ‘책’을 매개로 고객들을 서로 연결하는 셈이에요.
넘쳐나는 콘텐츠의 시대, 서점이 필요한 이유
“건축으로 서점이 도시와 사람들을 이해하는 도구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도운 서원과 이유 서점 공간 컨셉 인테리어를 담당한’우토피아 랩(Wutopia lab)’의 철학이에요. 우토피아 랩은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 알려진 ‘종서각'을 시작으로, 서점을 미학적인 관점으로 접근해요. 아름다운 서점은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을 모으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일각에선 ‘관광객이 와서 사진만 찍고 가는 인스타용 서점’이란 비판도 존재하지만 우토피아 랩은 평소 서점을 방문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방문하는 것도 취향의 실현이라고 봤어요. 서점 사진이 꾸준히 인기를 얻는 것도 사람들의 ‘책이 있는 공간에 대한 선망'이라고도 볼 수 있죠.
한편, 오늘날엔 책 이외에도 다양한 콘텐츠로 세상을 이해할 수 있죠. 따라서 변화한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게 서점 역시 그것에 맞게 달라져야 한다고 봤어요. 그래서 온라인 서점을 통해 언제든지 필요한 책을 살 수 있는 시대에, 오프라인 서점을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도 불러들이는 문화 공간으로 리디자인한 거예요. 지식 습득뿐 아니라, 사람들의 취향을 연결하고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으로서, 상하이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실천하는 수단이자 세상을 이해하는 공간이 되는 것이 이유 서점의 목표예요.
무수한 콘텐츠가 범람하는 시대에 과거와 같은 물리적 분서 행위는 불가해요. 하지만 정보의 포화 속에서 책을 멀리하게 되는 암묵적 분서 행위는 일어나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렇기 때문에 맥이 끊길 뻔한 책들을 숨겨놓은 공간이라는 상징을 가지고 있는 이유 서점 같은 곳들이 필요한 거 아닐까요.
Reference
• 이유서점 위챗 공식 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