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종류의 새로운 아이디어든 새로운 건물을 짓는 데에 들어가는 높은 비용 때문에 우연한 시행착오와 실험에 대한 여유가 없어요. 오래된 아이디어는 때때로 새로운 건물을 사용할 수 있지만, 새로운 아이디어는 오래된 건물을 사용해야 합니다.”
-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The Death and Life of Great American Cities)>
도시 계획가인 제인 제이콥스는 그의 저서에서 오래된 건물이 커뮤니티 구축, 도시 재생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주장했어요. 특히 공간에 구현하고자 하는 아이디어가 새롭다면, 오래된 건물이 오히려 적합하다고 말하죠.
건물의 나이와 기획의 신선함이 낳은 낙차에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힘이 있어요. 어마어마한 비용 절감 효과는 덤이고요. 쓸모가 사라진 건물에 새로운 용도를 찾아 집객력을 갖추고, 도시의 랜드마크가 된 사례들에서 공간 재생, 도시 재생의 힌트를 얻어 볼까요?
1️⃣ 콜롬비아 서클
100년 가까이 외부에 개방되지 않았던 은밀한 공간이 있어요. 한 때 이곳은 상류계층 사교장으로 초대받은 사람만 들어올 수 있었던 곳이었어요. 이후 미 해군 주둔 시설이 되었다가, 2차 대전 후엔 균과 백신을 연구하는 생명 공학 연구 시설로 쓰였고요. 외부인 출입 보안은 더욱 강화되어 70년 넘게, 일반인들에겐 허락되지 않은 금단의 구역으로 남아 있었어요.
그런데 2018년 8월, 베일에 가려진 이 공간이 별안간 대중들에게 공개되었어요. ‘콜롬비아 서클’이란 이름으로요. 오랜 역사가 깃든 건물 3동과 연구소 및 사무실 용도로 쓰이던 건물 11채가 상하이의 문화예술복합시설로 재탄생했어요. 건물에 딸린 정원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원으로 탈바꿈했고요.
100년 가까이 된 건축물에 트렌디한 문화 콘텐츠를 채워 상하이 핫플레이스로 대번에 등극해요. 과거 상류 사회의 문화 예술 사교장이 공공 문화 영역으로 확장된 셈이죠. 상하이에 방문했을 때 상하이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데려가는 대표 장소이기도 해요. 100년 전 만들어진 콜롬비아 서클은 오늘날 어떤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을까요?
2️⃣ 화산1914 문화창의원구
1914년에 지어져 양조장으로 쓰이다 수십 년간 방치된 부지가 있었어요. 그것도 타이베이 시내 한복판에요. 예술가와 시민 운동가가 제기한 문제 의식을 시작으로, 대만 정부가 주축이 되어 이 장소를 문화 예술 산업의 중심지로 개발하고자 했죠. 하지만 결과는 실패.
심폐소생할 길 없어 보였던 여기에 구원투수가 나타난 건 2007년의 일이었어요. 출판사를 운영하던 왕롱웬 회장이 ‘대만문화창의발전 유한회사’를 세우고 이 곳의 경영권을 인수한 거예요. 이름은 ‘화산1914 문화창의원구’. 17년이 지난 지금, 화산1914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연 방문객만 300만명 이상. 타이베이 전체 인구가 한 번 이상 방문한 숫자예요. 도대체 화산1914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길래 강력한 집객력을 갖게 된 것일까요? 참고로 화산1914는 책을 출판하듯, 공간을 ‘출판’하면서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어요.
3️⃣ 대만 디자인 연구원
레드닷 디자인 뮤지엄은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수상작들을 모아둔 곳이에요. 독일 에센에 처음 문을 열었고, 아시아 지역에는 싱가포르에 첫 번째로 진출했죠. 그리고 아시아의 두 번째 도시로 타이베이를 선정했는데요. 이 세 곳의 공통점이 있어요. 바로 오래된 공간을 활용해 뮤지엄을 만든 거예요.
에센에서는 탄광 공장을, 싱가포르에서는 교통 경찰청을, 타이베이에서는 담배 공장을 리모델링 했죠. 이유가 뭘까요?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페터 제흐 회장의 말을 들어볼게요.
”완벽한 창조는 없듯 무에서 만들어지는 혁신은 없습니다. 낡은 건물에 최신의 디자인을 추가하면 감각과 새로운 활력이 생기고, 사람들이 찾아오는 드라마가 펼쳐집니다.”
담배 공장이 있었던 송산문화창조단지는 그의 말에 딱 들어 맞는 곳 중 하나예요. 이 곳에 자리잡았던 레드닷 뮤지엄은 이제 ‘타이완 디자인 뮤지엄’으로 바뀌었지만, 디자인적으로는 더 깊어졌어요. 대만 디자인 연구원이 뮤지엄 외에 주요 디자인 어워드 수상작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디자인 핀’ 매장과 디자인 관련 서적이 2만권 가량 있는 ‘낫 저스트 라이브러리’를 추가로 오픈했으니까요.
대만 디자인 연구원의 주도 하에 지금 대만의 디자인 씬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뽐내는 세 곳을 함께 둘러 볼까요?
4️⃣ 신풍관
2020년, 에이스 호텔이 아시아 지역의 첫 호텔을 교토에 열었어요. 에이스 호텔은 도시와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유니크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죠. 원칙은 ‘도시의 개성 있는 문화를 드러낸다’는 것. 그래서 역사와 스토리가 있는 도시를 선택하고, 그 도시에서 의미 있는 건축물을 활용해요. 시공할 때도 현지의 디자인 업체, 건축가, 장인들과 협업하고 다양한 로컬 이벤트를 개최하기도 하고요.
에이스 호텔 교토가 들어선 곳은 '신풍관'이라는 건물이에요. 원래는 1926년부터 교토 중앙 전화국으로 쓰였던 곳으로, 2001년에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어요. 교토에 새 바람을 불러오겠다는 의지를 담아 이름도 '신풍관(新風館)'. 감도 높은 브랜드들이 입점하면서 교토의 랜드마크로 우뚝 섰는데, 2016년에 두 번째 리노베이션을 진행했어요. 100년 기업이 몰려 있는 교토의 전통과 혁신을 융합하겠다는 컨셉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교토의 얼굴'이 되겠다는 새 바람을 담아서요.
도대체 신풍관은 어떤 매력을 가지고 있길래, 에이스 호텔이 아시아 지역에 진출하면서 첫 번째로 선택한 장소가 되었을까요?
5️⃣ 오모테산도 힐즈
역사성과 상업성이 충돌했어요. 일본 최초의 집합 주택 중 하나인 아오야마 아파트 재건축 사안을 두고서죠. 양측의 의견을 모은 건 건축가 안도 다다오였어요. 역사적 상징성을 무턱대로 보존할 수도, 그렇다고 무시하고 개발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그는 복합주택의 유산을 완전히 허물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상업 공간으로 기능할 랜드마크를 짓고자 고민했죠. 그 결과 4가지 원칙을 세웠어요. 역사성을 일부 보존하면서 공공성과 수익성의 균형을 유지하겠다는 방향성을 명확히 한 거예요.
첫째, 복합시설 내 일정 규모의 주거 공간을 확보할 것.
둘째, 전면의 가로수를 고려해 건물 높이를 제한할 것.
셋째, 오모테산도 거리와 이어진 퍼블릭 스페이스를 중심에 둘 것.
넷째, 아오야마 아파트 한 동, 또는 두 동을 있는 그대로 보존할 것.
그렇게 등장한 ‘오모테산도 힐즈’는 이러한 방향성이 거의 대부분 그대로 구현됐어요. 그렇다면 안도 다다오는 오모테산도 힐즈를 설계하면서, 이 어려운 약속을 어떤 방법으로 지킨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