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아를 해킹해서 환자를 돌본다, ‘핵 케어(Hack Care)’의 등장

골든 핀 디자인 어워드 #2.환자

2023.12.12

대만은 디자인 강국이에요. 그 최전선이자 구심점이 되는 단체가 있어요. 바로 ‘대만 디자인 연구원’. 시티호퍼스에서도 이전에 한 번 소개한 바 있는데요. 대만 디자인 연구원에서는 매해 ‘골든 핀 디자인 어워드’를 개최해요. 이 디자인 대회는 1981년부터 대만 디자인 산업에 활기를 불어넣고 육성하기 위해 시작됐어요. 그러다 2014년부터는 글로벌로 무대를 넓혀 지금은 아시아를 대표하는 디자인 어워드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죠.


‘골든 핀 디자인 어워드’는 크게 3가지 영역에서 작품을 수상해요. 제품, 서비스, 공간 등에 수여하는 ‘골든 핀 디자인 어워드’, 아직 상품화되지 않았지만 디자인 컨셉이 뛰어난 작품에 수여하는 ‘골든 핀 컨셉 디자인 어워드’, 대만의 디자인 전공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여하는 ‘영 핀 디자인 어워드’로 구성되어 있어요. 아직 실제로 구현되지 않은 아이디어나 주목받지 못하던 신진 디자이너들까지 존중하는 카테고리들이 인상적이에요.


시티호퍼스가 2023년 12월 초, 따끈하게 공개된 골든 핀 디자인 어워드의 수상작들을 살펴 봤어요. 총 600여 개의 수상작이 있었는데요. 시티호퍼스가 수상작들 중에서 주목한 건 ‘모두를 존중하는 디자인’이에요. 이 관점으로 보니 골든핀 디자인 어워드에서는 반려동물, 환자, 버려진 공간, 어린이, 전통 문화를 존중하고 있었어요. 오늘 만나볼 수상작은 치매 환자와 간병인을 존중하는 디자인이에요.


[골든 핀 디자인 어워드 #2.환자] 미리보기

 #1. 이케아의 카탈로그 양식을 해킹하다

 #2. 오리지널 가구 디자인을 해킹하다

 #3. 간병인과 환자의 마음을 해킹하다

 사려 깊은 해커처럼 행동하라




가구 기업이 해킹을 당하고 있어요. 그것도 꽤 오랜 시간 말이죠. 해킹은 내부 정보에 접근하기 위에서 취약한 보안망을 뚫고 허가 없이 컴퓨터 시스템에 접속하는 것을 뜻해요. 주로 첨단 기술이나 안보를 다루는 기업, 기관에서 종종 겪는 심각한 문제죠. 그런데 가구 기업이 해킹의 대상이라니, 경쟁사가 최신 가구 트렌드나 가구 제조 정보라도 빼내려는 걸까요? 


상상 같지만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이 사건의 주범은 경쟁 가구사나 인테리어 업계가 아니에요. 다름 아닌 고객들이죠. 이들은 대범하게도 글로벌 홈퍼니싱 기업 ‘이케아’를 상대로 해킹을 일삼아요. 어떻게냐고요? 구매 후 직접 조립해서 쓰는 이케아의 가구 특성을 이용해서, 가구를 본인이 원하는 디자인으로 변형시키는 거예요. 단순 리폼 수준이 아니에요. 색깔을 바꾸는 간단한 디자인 개선부터 가구의 하드웨어를 서로 뒤바꾸는 것, 본래의 용도와 전혀 다르게 사용하는 것까지 천차만별이죠. 심지어 이런 활동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까지 생겼어요. ‘이케아 해킹(IKEA hacks)’이에요.


사람들은 SNS로 해킹 아이디어를 서로 공유해요. ‘올해의 해킹 아이디어’를 선정하는 홈페이지까지 있어요. 해킹에 대한 사람들의 뜨거운 열정은 파생 산업으로까지 확장됐어요. 기존 이케아 가구의 표준 프레임에 맞춘 개별 부품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가구 브랜드들이 생겨났거든요. 슈퍼프론트(SUPERFRONT), 플라이키아(PLYKEA) 등의 업체는 이케아에서 판매하는 주방 수납장, 옷장 등에 접목시켜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조리대, 커버, 도어 등을 판매해요. 출발은 이케아의 가구로, 맺음은 자신들의 가구로 하도록 만든 거죠.



ⓒSUPERFRONT


당사자인 이케아는 한술 더 떴어요. 고객의 해킹 활동에서 영감을 받아 ‘이케아 해킹: 우리의 제품. 당신의 아이디어(IKEA Hacked: Our Products. Your Ideas.)’라는 이름의 전시를 선보이기도 했으니까요. 이 전시회에서는 30명이 넘는 예술가와 디자이너가 이케아 제품의 용도를 변경해서 만든 예술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이케아 매장에서 누구나 들고 다니는 가방으로 만든 맞춤 드레스부터 시그니처 테이블로 만든 조각상까지 말이죠. 이 밖에도 제품을 기존 용도와 다른 방식으로 활용해 보라며 고객의 창의성을 자극하는 제안을 던지기도 해요.



ⓒIKEA


이처럼 ‘이케아 해킹’은 다양한 산업군에서 문제가 되어온 기존의 해킹과는 의미도, 의도도 달라요. 브랜드를 향한 고객들의 애정과 창의성이 넘쳐서 이케아의 플랫팩(flatpack)* 안에 담을 수가 없어 벌어진 일이니까요. 이는 소비자의 삶은 물론 이케아의 브랜드 생명력까지 풍요롭게 만드는 중이에요. 사람들은 이케아에게 ‘플랫팩 바깥에서 생각하는 법’을 알려주고 있죠.

*플랫팩(flat pack): 가구를 완성품이 아니라 납작한 상자 안에 부품 형태로 담아 파는 이케아의 포장 방식이에요. 


그런데 이번에는 또 다른 유형의 해커 집단이 등장했어요. 이들은 기존의 고객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케아를 해킹해요. 해킹의 목적도 다르고요. 이번 해킹은 올해 골든 핀 디자인 어워드 수상은 물론, 싱가포르 대통령 디자인 어워드(President*s Design Award 2023)에서 ‘올해의 디자인’으로 선정되기도 했어요. 대체 어떤 활동이길래 해킹으로 상까지 받게 되었을까요? 지금부터 그 사연을 알아볼게요.



#1. 이케아의 카탈로그 양식을 해킹하다

자신들의 해킹 실력을 자랑이라도 하듯 겉표지의 제목부터 ‘핵 케어(Hack care)’예요.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사진 속에서는 모델들이 집 안 가구에 둘러싸여 행복하게 미소 짓고 있죠.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이 카탈로그는 구도부터 폰트, 내용까지 홈 디자인 아이디어를 모아 놓은 이케아의 카탈로그를 떠올리게 해요. 근데 닮은 게 겉모습만이 아니에요. 내지에는 이케아에서 판매 중인 가구들이 등장하고, 소개하는 포맷까지 이케아의 카탈로그 원본과 똑 닮았어요. 대신 우측 하단에 있는 로고는 해킹으로 교체됐죠. 이래도 되는 걸까요?



(좌)ⓒLien foundation / (우)ⓒIKEA


하단에 쓰여 있는 작은 글씨를 보면 이 카탈로그의 본심을 알 수 있어요. 작은 글씨로 ‘핵 케어: 치매 친화적인 집을 위한 팁과 요령(Hack Care: Tips and Tricks for a Dementia-Friendly Home)’이라고 쓰여 있거든요. 한 마디로 이 카탈로그는 가구를 판매하거나 홍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에요. 누구나 자신의 집을 치매 환자에게 적합한 집으로 꾸밀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제작됐어요. 싱가포르의 자선 재단인 Lien이 Lekker Architects, 산업 디자인 스튜디오 Lanzavecchia + Wai Studio와 함께 만들었죠.


핵 케어는 집을 치매 친화적인 공간으로 바꾸기 위해서 이케아의 가구를 해킹하는 방법과 팁들을 선보이는데요. 재밌는 점은 정작 가구 기업인 이케아는 핵 케어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거예요. 카탈로그에도 핵 케어는 이케아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문구가 쓰여 있고요. 그런데 리엔 재단은 왜 핵 케어를 만들면서 굳이 아무 상관도 없는 이케아를 끌어들였을까요? 치매라는 의료적 주제와 가구 기업은 아무런 접점이 없어 보이는데 말이에요.


이 사건의 시작은 프로젝트를 맡은 Lekker Architects의 디자인적 관점에서 비롯됐어요. 치매에 관련된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책을 찾아봤더니 대다수가 ‘환자 중심으로 생각하세요’ 등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거든요. 반면 치매 환자의 간병인은 언제나 일손과 시간이 부족하고, 스트레스가 많았어요. 대다수가 전문 간병인이 아닌 채로 갑자기 치매 가족을 돌보게 됐기 때문이죠. 그들을 위해서는 원칙(principle)과 실행(practice) 사이의 괴리감을 줄여줄 도구가 필요했어요.


이때 디자이너들은 치매 환자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 집이라는 점에 주목했어요. 집에서 노년을 보내는 것은 치매 환자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보통의 집은 환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경우가 드물었죠. 그러니 치매 환자와 간병인을 위해서는 환자의 상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집부터 바꿔나갈 필요가 있었어요. 그리고 집에서의 생활을 디자인하는 가구 기업의 대표격은 바로 이케아였죠. 특히 이케아의 가구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데다가 가격대도 저렴해서 접근성이 좋았어요. 소비자가 직접 조립해서 완성하는 가구라서 변형시키기에도 적합했고요.


그렇게 홈 라이프의 대명사인 이케아는 이 프로젝트의 비공식 파트너이자 주인공이 됐어요. 그런데 더 정확히 말하면, 진짜 주인공은 이케아가 아니라 이케아의 카탈로그예요. 1951년에 스웨덴어로 1호가 발행된 이후 70년간 이케아의 간판이었던 카탈로그를 해킹하기로 했거든요. 이때, 새롭게 바뀐 공간을 쇼룸으로 보여주는 대신 카탈로그를 선택한 이유가 있어요. 이케아의 카탈로그는 다양한 정보를 직관적이고 함축적으로 전달하는 힘이 있었거든요.


디자이너들은 이케아의 카탈로그에 적혀있는 시각적 언어와 디자인에 주목했어요. 카탈로그 속 이미지는 언제나 집이라는 공간의 의미를 신선하게 재해석해왔죠. 덕분에 누구나 인테리어 트렌드를 쉽고 빠르게 알 수 있었어요. 유머를 품은 짧은 캐치프레이즈는 ‘누구나 이런 공간을 만들 수 있다’는 영감과 용기를 주기도 했고요. 이처럼 이케아는 카탈로그를 고객들과 교감하는 매개체로 활용해 왔어요. 핵 케어는 이케아의 카탈로그만이 가지고 있는 화법과 관점을 차용하기로 한 거예요.



#2. 오리지널 가구 디자인을 해킹하다

핵 케어는 총 240페이지로 구성되어 있어요. 인쇄된 종이 카탈로그는 이케아의 제품이 그러하듯 플랫팩안에 담겨 있죠. 1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던 프로젝트는 완성까지 3년 반이 걸렸어요. 치매 환자가 있는 가정에서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솔루션을 개발하고 제공하기 위해서였는데요. 이때 디자이너들은 보기 좋고 이해하기 쉬운 이케아의 카탈로그 형식을 해킹하는 것을 넘어, 이케아의 가구까지 수단으로 삼기로 했어요. 기존 가구를 그대로 쓰지 않고 가구를 해킹해서 변형할 수 있도록 돕는 거예요. 그래서 이 책에는 50개가 넘는 디자인 해킹법과 트릭들이 담겨 있어요.



ⓒHACK CARE Instagram


해킹의 목표는 치매 환자가 집에서 겪는 불편함과 고충을 줄여서 이들에게 활력을 되돌려주는 것이었어요. 가구 중 첫 해킹 대상은 의자였는데요. 다 이유가 있어요. 치매 환자에게 의자는 남다른 존재거든요. 치매가 생기면 근육이 위축되어 이동성이 떨어져 의자에서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돼요. 낮잠을 자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모두 이 의자에서 하죠. 환자를 둘러싼 주변 세계가 계속 축소되면 의자에 대한 의존도도 올라가요. 그러니 환자에게 의자는 아늑한 오아시스인 동시에 마지막 보루인 셈이에요.


그래서 디자이너들은 의자가 환자에게 ‘제2의 집’이 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식의 해킹을 시도했어요. 그 결과 이케아에서 40년 넘게 사랑받아온 클래식 암체어 ‘포엥(POÄNG)’은 견고한 버전으로 다시 태어났죠. 등받이는 더 세우고, 팔걸이와 의자 다리를 강화해서 환자가 혼자서도 쉽게 앉고 설 수 있게 했어요. 동시에 편안하게 머리를 기대고 잘 수 있도록 머리 받침대도 만들었고요. 가구 해킹을 통해 환자의 행동을 디자인해서 스스로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 거예요.



ⓒLien foundation



ⓒLien foundation


다음 해킹은 의자와 함께 사용하면 시너지가 나는 가구로 이어져요. 원래 옷방, 세탁실, 탕비실 등에서 수납장으로 쓰이는 이케아의 ‘알고트(ALGOT)’를 변형시킨 후 의자와 함께 배치해서 집 안의 ‘케어 스테이션’을 만들었죠. 기존 수납장에 블라인드와 덮개를 달아 만든 케어 스테이션은 환자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줘요. 또 이곳에는 환자가 자주 쓰는 아이템들을 비치해둘 수 있어요. 건망증으로 인해 기억력이 서서히 감퇴되는 치매 환자는 직접 붙여놓은 메모나 아이템을 보면서 기억을 되새길 수도 있고요.



ⓒLien foundation



ⓒLien foundation


한편 가구가 아닌 작은 소품들을 사용해서 치매 환자의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잠재우기도 해요. 원래 도마로 쓰이는 2.9달러(약 4,000원)짜리 보드를 ‘피젯 보드(fidget board)’로 만들어서 말이죠. 피젯은 긴장하거나 불안감을 느낄 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을 뜻해요. 이럴 때 피젯 스피너, 피젯 보드 등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 긴장된 에너지가 누그러지고 마음을 차분하게 할 수 있어요. 그래서 깨끗한 도마 위에 자물쇠, 버클, 스위치 등을 붙이는 거예요. 그것들을 만지다 보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고 촉감 운동도 할 수 있죠. 또한 핵 케어는 단순히 해킹의 결과물만 공유하는 게 아니라 각종 해킹 팁도 전수해요. 예를 들어 피젯 보드를 만들 때 숫자를 조합해서 여는 자물쇠, 예전에 사용했던 물건들을 사용하면 뇌를 자극하는 한편, 환자의 오래된 기억을 일깨울 수 있어서 도움이 된다는 조언도 덧붙이죠.



ⓒLien foundation


핵 케어의 해킹 활동은 가구나 소품을 리폼하는 것을 넘어 여러 개의 가구를 엮기도 해요. 예를 들어 손잡이, 사다리형 스탠드, 책장, 가죽 핸들처럼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상품들을 벽에 일렬로 배치하죠. 이렇게 하면 환자가 원할 때 언제든 침대에서 화장실까지 붙잡고 이동할 수 있는 지지대가 만들어져요. 물론 지지대가 아닌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죠. 하지만 환자라고 해서 늘 타인의 도움을 반기는 건 아니에요. 보행 보조 기구나 안전 난간을 사용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이번 해킹에서는 일상적인 가구와 알록달록한 소품들로 지지대를 만들었어요. 환자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나의 인테리어로 변장시켜서 말이죠.



ⓒLien foundation


이처럼 핵 케어는 이케아의 가구를 해킹한 결과들을 차례로 공유하면서 치매 환자가 집에서 겪을 수 있는 고충을 제거시켜 나가요. 오리지널 가구의 용도를 살짝 비틀거나 조합하는 것만으로도 치매 환자의 불안감과 불편함이 대폭 줄어들죠. 50가지가 넘는 팁과 요령은 진짜 디자이너나 목수, 해커가 아니어도 누구나 따라 할 수 있을 정도의 난이도예요. 이케아 카탈로그를 읽듯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각자의 환경의 맞게 해킹을 시도해 보고픈 창의성도 자극되죠. 이것이야말로 리엔 재단과 디자이너들이 의도했던 바예요. 이케아가 가구를 통해 인테리어의 민주화를 꿈꿨듯이, 핵 케어도 디자인을 민주화시키고 싶었던 거죠. 그렇게 하면 누구나 디자인을 통해 나만의 ‘치매 친화적인 집’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3. 간병인과 환자의 마음을 해킹하다

핵 케어에 적혀 있는 이케아 가구의 대표적인 해킹 사례는 총 6개예요. 그 밖에 적혀있는 해킹 꿀팁과 요령을 다 합치면 50개 내외죠. 그런데 카탈로그의 전체 분량은 총 240페이지나 돼요. 그렇다면 나머지 페이지는 어떤 내용들이 채우고 있는 걸까요? 만약 핵 케어의 진짜 면모를 알고 싶다면 나머지 페이지들을 제대로 살펴봐야 해요. 여기에 핵 케어의 정수가 들어 있거든요.


이 카탈로그 곳곳에는 치매 환자들이 어떻게 일상생활을 보내고, 자극을 인지하고 반응하는지 등에 관한 정보들이 적혀 있어요. 집에 있는 가구는 물론 조명의 조도, 소품의 색깔 등 미세한 환경 변화가 환자에게 어떤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지 디테일하게 알 수 있죠. 가족이지만 낯설게 느껴졌던 치매 환자의 행동 변화도 ‘환자 마음 설명서’나 다름없는 이 카탈로그를 읽고 나면 한결 이해하기 수월해져요.


그뿐 아니에요. 핵 케어에는 알츠하이머병 협회(ADA) 및 병원의 전문가들이 제공한 인사이트가 포함되어 있어요. 덕분에 하루아침에 치매 환자의 간병인이 된 사람들도 당황하지 않고 따라 할 수 있는 지침서가 생겼죠. 이 지침들을 의학 서적처럼 사실만 나열하는 식으로 설명하는 게 아니에요. 대신 핵 케어에 등장하는 캐릭터인 ‘알버트와 루시’를 통해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전달하죠.



ⓒLien foundation


예를 들어 볼게요. 핵 케어는 치매 친화적인 집을 만들기 위해서는 부엌을 ‘활동 존’과 ‘쿠킹 존’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알려줘요. 치매 환자라고 해서 무조건 배제시킬 것이 아니라, 불을 사용하지 않는 안전한 활동 존에서는 환자가 음식 준비를 도와줘도 된다면서 말이죠. 이 페이지에는 작은 글씨로 캐릭터인 루시의 이야기가 쓰여 있어요. “평생 자부심을 가지고 가족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왔던 루시는 이제 치매 환자가 됐어요. 하지만 여전히 요리의 많은 단계들을 기억하고 있죠. 늘 요리를 좋아했고, 요리는 루시에게 자율성과 힘, 목적의식을 주었으니까요.” 이렇게 지침을 스토리 형태로 읽고 나면 잘 잊혀지지 않아요. 무작정 환자를 부엌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불상사가 생길 일도 없죠.



ⓒLien foundation


핵 케어가 알아주는 건 환자의 마음만이 아니에요. 책의 마지막 목차인 ‘목소리(Voice)’는 간병인을 위한 페이지예요. 알츠하이머병 협회는 이 페이지에서 간병인들이 자신의 가족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면 좋을지 조언하면서도, 정해진 형식은 없으니 상황에 맞춰 대응하면 된다고 용기를 불어 넣어줘요. 그것만이 지금 할 수 있는 전부라고 덧붙이면서 말이죠. 또 휴식이 필요하다고 느낄 땐 죄책감을 느끼지 말고 쉬는 시간을 가지라고 말해요. 이런 이야기야말로 간병이라는 긴 여정에 들어선 치매 환자의 가족들이 한 번쯤 듣고 싶었던 말 아닐까요?


“당신 스스로도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우리도 여기서 당신을 도울 거고요. (You can do it yourself, and we’re here to help you.)”

- ‘핵 케어’ 카탈로그 중에서


치매 환자와 간병인의 마음까지 들여다보며 해킹 대상을 확장한 핵 케어가 긴 카탈로그의 마지막 장을 덮기 전에 던진 메시지예요. 그런데 평소에 이케아의 카탈로그를 애독했던 사람이라면 이 문구가 낯익을 거예요. 이케아 카탈로그의 마지막 장에도 비슷한 문구가 나오거든요. 이건 ‘당신 스스로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죠.(You can do it yourself, but you don’t have to…)’라는 기존의 캐치프레이즈를 살짝 비튼 거예요. 핵 케어가 마지막까지 이케아의 카탈로그를 해킹해서 센스 있게 메시지를 전달한 거죠. 이제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당신만의 해킹 프로젝트를 시작하라면서 말이에요.



ⓒLien foundation



ⓒIKEA



사려 깊은 해커처럼 행동하라

핵 케어는 세계 알츠하이머의 달인 9월에 공개되며 온라인에서 e-book 형태로 무료 배포됐어요. 그런데 실제 책자를 갖고자 하는 아시아, 유럽, 미국의 요청에 따라 3,500부를 종이 책자로도 인쇄했죠. 이 책자를 찾았던 것은 주로 치매 간병인과 의료 복지 전문 인력이었어요. 이들은 핵 케어에 적힌 해킹 팁을 따라서 사랑하는 가족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각자만의 해킹에 돌입했죠.


이 프로젝트가 시작된 싱가포르에서는 무관심하고 개의치 않는 태도를 가리킬 때 ‘Heck-care’라는 말을 사용해요. 이제 철자 하나만 바뀐 ‘핵 케어(Hack care)’는 정반대의 의미로서 수많은 간병인을 창의적인 디자이너이자 해커로 바꿔나가는 중이죠. 이건 프로젝트의 디자인을 맡은 옹 커싱(Ong Ker-Shing)이 원했던 바였어요. 그녀야말로 2009년부터 치매 투병을 시작한 아버지를 간병하며 주변 환경의 영향을 실감했던 사람이었죠.


"우리는 집에서 치매에 빠진 아버지가 어떻게 환경 변화에 반응하는지 봤어요. 무엇보다 이렇게 환경을 바꾸는 일은 건축가나 디자이너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가족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게 됐죠.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치매 친화적인 집을 만들기 위해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들도 디자이너처럼 생각하고, 해커처럼 생각해서 환경을 조정하도록 돕는 거예요. 창의성과 유연성에 불을 붙여서 그들이 물리적인 환경을 개선하고, 누군가를 더 잘 돌볼 수 있게 돕는 것이었죠.” 

- 옹 커싱, Hype&Hyper 인터뷰 중에서


이처럼 핵 케어는 단순한 인테리어 책자도, 치매 입문서도 아니에요. 누구나 디자이너처럼, 해커처럼 생각할 수 있도록 장벽을 걷어 젖힌 도움닫기 같은 존재죠. 이제 핵 케어를 한 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사랑하는 가족을 돌보기 위해 기꺼이 해커이자 디자이너가 되려고 하지 않을까요? 그들이야말로 환자의 삶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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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

• HACK CARE 공식 홈페이지

 이케아 공식 홈페이지

 Hack Care: Tips and Tricks for a Dementia-Friendly Home, Golden Pin Design Award

 Hack Care: Tips and Tricks for a Dementia-friendly Home, President*s Design Award

 Hack your home into a dementia-friendly environment | Hack care, Hype&Hy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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